1795
인도 타밀 나두Tamil Nadu의 동해안 쿠달로르Cuddalore 지역에서 네 명의 직조공이 영국동인도회사 주재원인 데이비 베르파 체티Davie Veerpah Chetty의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 불태웠다. 일반적으로 그런 지푸라기 인형은 ‘죄 많은 삶’을 살았거나 처참하게 죽은 경우와 같은 ‘좋지 않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에 사용되었다. 체티의 인형이 불태워진 것은 [당시]‘개인화된 폭력이 핵심 역량중 하나’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선구자임을 자처하며 자본주의적 규율을 수백명의 독립 직조공들에게 부여했던 동인도회사에 대항하는 지난 30년간의 투쟁[의 과정]에서 빚어진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전에는 직조공들이 인도상인들과 거래했을 뿐 아니라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들과도 거래를 했었다. 프랑스 회사를 위해 일을 했었던 체티의 아버지는 앞으로는 영국와 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퐁디셰리[1]와 그 내륙 지역[의 땅]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결정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무굴제국Mughal Empire의 쇠퇴[2]와 해체로 인해 영국의 동인도회사(EIC)[3]는 1763년 청갈파투Chingleput[4]에서 조세권을 얻었고, 마드라스Madra[5]와 쿠달로르Cuddalore 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갔고, [이로 인해] 프랑스령은 소수 민족 거주지로 축소되었다.
그들은 체티 같은 동인도회사의 주재원들은 물론 쇠락하는 인도의 보병대와 세포이로부터 자체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자체군을 모집한 것은] 1771년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지역 직조공들이 식민지 경쟁국가들과 거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후에는 식민지 반대론자들과 싸우고, 지역의 직조공들에게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식민지 이전의 인도에는 없었던 국가 권력과 권위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 [그리고] 그들은 전례없이 직조공보다 우위에 섰다.” 초기에는 직조공에 대한 대우가 꽤 좋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14 세기 플랑드르 직조공에 대한 처우나 오늘날 노동착취 공장sweatshops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비슷하게 변해갔다. 먼저 직조공들은 그들이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원사를 구매하도록 정책을 바뀌었다. 그리고 [동인도] 회사는 독점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직조공과의 계약을 언제라도 파기할 수 있는 상황으로 뒤바뀌었다. [또한] 한 달에 두 개의 긴 천을 생산해 내라고 요구핶기 때문에, 노동의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는데, 직조공들은 이것이 ‘불가능하고 억압적’이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엄격한 자체 품질 관리를 도입했고, [게다가] 언제라도 [그들이 짠] 직물(cloth)을 반품할 수 있었던 식민지 이전과는 반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직조공이 개인 상인과 일을 하면, “동인도회사의 구마슈타Gumashta[6]가 그 직조공은 물론 그의 아들까지도 체포하여 심하게 매질을 했다. [그리고] 얼굴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한 뒤, 손은 등뒤로 묶고,세포이들이 이들을 감시한 상태에서 마을을 걸어 돌아다니게 했다. 이는 ‘누구라도 개인상인과 일을 하는 직조공은 같은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표하는 것과도 같았다.” 1770년대에는 직조공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19세기 초에 이르러 직조공의 수요가 감소한다), 1779년에 이르면, 그들의 수입이 1768년이후 35%가량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로 인해 직조공들이 단합하여 작업을 중단하거나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1775년 사카르 북부North Sarkars에서는 파업이 4개월가량 지속되었고, 3년 후 1000명의 직조공들이 쿠달로르Cuddalore에 합류했으며, 7개월 동안 회사 투자를 방해하였다. 1789년 아르니에서는 직종공들에게 관습을 어기고 약탈을 일삼는 군대가 빼앗아간 옷감에 대해 배상하라고을 요구했던 [회사의] 대리인들을 채찍으로 때리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회사 소속이 아닌 직조공에게 부과된 세금이나 요구를 피하기 위해 동인도회사가 부채 회수나 탈출을 막는 사냥꾼으로 세포이군을 고용하는 동안 직조공들의 베틀을 빼앗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전술도 자주 사용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전형적인 식민지전략에 맞게 분류하고 구분하는 카스트제도에 기반하여 직조공들을 다루었고, 그들의 불만을 엄격하게 경제적인 것으로만 보고자 했지만, 그들은 직조공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쿨리coolies[7]‘라고 분류하고 정의한 경우처럼 그들의 자부심을 공격한다고 생각한 경우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드러난 것은 … 원시주의primordialism가 암시하는 것처럼 직조공들의 (사회의 온갖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강인함이 아니라 그 가변성plasticity이다. 직조공이 만든 연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뛰어난 독창성, 풍부한 자원과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저항하는 행위 자체, 그리고 저항하기 위한 동원의 필요성은 직조공들이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창조하도록 이끌었다.”
[1] 인도 동부 타밀나두 주의 인접 지역에 위치한 푸두체리의 행정 중심지이다
[2]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중남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왕조이다. 무굴 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이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1857년 무굴제국은 멸망했다.
[3] British East India Company의 약칭
[4] 인도 타밀 나두주의 도시
[5] 현 인도의 첸나이, 1996년까지 마드라스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6] Gomashta 라고도 표기. 동인도회사에 있던 인도인 에이전트를 일컬음
[7]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중국, 인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계 외국인, 이민자들을 일컫는 말로 정규적인 일자리가 없는 단순 노동자였다. 주로 대영 제국의 식민지, 옛 식민지인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페루,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하와이, 피지, 모리셔스, 레위니옹 섬, 서인도 제도,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저임금으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