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gro Cloth | 니그로 천

뒤편의 구찌 우비와 모자, 맞춤 제작한 재킷을 입고 할렘 매장에 있는 대퍼 댄Dapper Dan

“나는 많은 흑인들이 날씨 때문에 체온 저하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바람도 습기도 통하지 않는 얇은 천을 걸치고 있다.”
– 혼 T.T. 보울딘 Hon T.T. Bouldin, 노예 소유자, 미국 의회, 1835년 2월 16일.

당시 ‘플림지 천flimsy fabric’은 니그로 천 Negro Clothes이라 불렸으며, 미국의 남쪽에 있는 몇몇 소수의 방직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이 천은 거칠고 표백되지 않거나 갈색의 면직, 혹은 양모와 면의 혼방이었고 노예와 죄수복에 사용되었다.  1735년의 흑인법 Negro Act에서는 [니그로 천을] 노예들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직물 중 가장 싼 직물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주인이 주는 헌 옷을 입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는 [흑인노예가 주인 주는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당시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복장 차이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18세기, 존 울먼 John Woolman은“농장의 흑인 남자는 5야드의 흰색 또는 파란색 니그로 천으로 만든 형편없는 코트와 긴 바지를 받는다. 남자와 여자들은 벌거벗은 몸을 [겨우] 가릴 정도의 아주 작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정도였고, 열 살에서 열 두 살 정도의 소년, 소녀들은 주인의 자녀들과 함께 있을 때,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많은 농장에서 노예들은 일 년에 한 번 옷감을 배급 받았다. 대부분의 노예는 [자신이 받은] 옷감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면화를 고르는 일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직접 옷도 만들어야 했다. 만약 옷이 다 낡으면, 다음 해까지 [거의] 벌거벗은 채로 지내야 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존 랜킨 Rev. John Rankin 목사는 “모든 노예제 국가에서는 많은 노예들이 노동을 하거나 잠을 자는 동안에 그들을 따뜻하게 해 줄 의복이 부족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라고 적은 바 있다. 19세기 초 노예들을 위한 칙칙하고 값싼 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매사추세츠 주, 로웰Lowell시에 있는 미국 북부 공장[1]들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로웰이라는 말은 노예들이 거친 천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예들은 자신의] 스타일 감각은 억누를 수 없었다. 인디고 염료를 만들었던 노예들은 자신의 옷을 만들 때에도 비밀리에 인디고를 사용하였다. 1744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법정의] 대배심은 “특히 흑인 여성들은 법이 요구하는 대로 옷을 입지 않고, 상당히 화려하고, 규칙에 어긋난 옷을 입는다”며 항의했다. 이는 식민 당국이 토로하는 지속적인 불만이었다. 17세기 브라질 식민 당국은 “[식민지] 국가의 여성 노예들의 복장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게 고상하다는 점”에 대해 우려했다. 1777년 미국 아룬델 카운티에서 도망친 노예 ‘딕Dick’은 건방지게도 녹색 천으로 된 코트, 파란색 커프가 달린 붉은색의 플러시 망토, 소매에 금색 레이스가 달린 짙푸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백인들은 [그에게] 경멸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이에 배우 패니 켐블 Fanny Kemble은 노예 폐지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노예들이 “프릴, 주름 장식, 리본, 양털 같은 그들의 머리에 꽂는 빗 등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고 다니는지 모른다”고 쓰고 있다.

1940년대에 미국 남부의 젊은 흑인들black Americans 과 젊은 멕시코계 2세대 파추초들pachuchos[2] 이 [앞다투어 유행처럼] 만들기 시작한 패션은 주트 수트 Zoot Suit[3]가 되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으며, 어깨를 흔들었고, 발목에 꼭 맞는 커프스로부터 위로 부풀어 오르는 형태의 바지 속에 있는 다리를 휘젓는다. 코트는 길고 엉덩이 부분이 꽉 끼며 어깨의 폭이 너무 넓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서양식의 외투가 될 수 없어 보인다. 혹은 이 옷은 할렘의 밤 문화의 언어로는 “드레이프 형태에 진짜 주름과 미치광이의 세포처럼 어깨에 패드가 덧대어진 굉장한 코트”라 불리기도 했다.

그 스타일이 어떻게,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전이 의견이 분분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옷감 배급이 성행할 당시 주트 수트는 인종적으로 ‘불량한’ 것 이자 ‘갱’의 의복으로 정의되었다. 전시산업위원회 The War Production Board는 주트 슈트를 효과적으로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재단사들은 불법적으로 수트를 계속 만들었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주트 수트족들은 경찰과 백인 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백인들은 1943년 로스앤젤레스와 디트로이트에서 인종 폭동을 일으켰다.[4] 주트 수트는 용인되기에는 너무 쿨하고 너무나도 공공연하게 반항적인 행동이었다. 1980년대 뉴욕 할렘에서 시작된 대퍼 댄Dapper Dan(다니엘 데이 Daniel Day)[5]의 하이패션의 ‘재-전유(專有)’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깔끔하게 차려 입고, 과도하게 자신을 꾸미며 외모에 대해 대단히 열정적인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많은 유명세를 얻었던 그의 가게와 디자인은 스포츠 스타, 허슬러, 힙합 아티스트들을 고객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밍크, 타조, 악어를 사용하여 “마초스럽고 민족적인 게토 스타일의 옷”을 “아프리카화 된 오트 쿠튀르”로 만들었다.

구찌, 루이비통 등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디자인을 베낀 대퍼 댄의 디자인에 법적 조치가 취해졌고 이후 그는 언더그라운드 패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2017년 구찌 크루즈 컬렉션은 1989년 올림픽 단거리 선수인 다이앤 딕슨 Diane Dixon을 위해 만든 재킷을 포함해 대퍼 댄의 디자인이 다수 소개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2017년 가을 전시에 그의 작품 일부를 [전시에] 초대하기도 했다.

[1] 로웰 공장Lowell Mills: 로웰 공장은 19세기 미국 메사추세츠 주 로웰시에서 운영되었던 텍스타일 공장으로 프란시스 카콧 로웰 Francis Cabot Lowell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월트햄-로웰 시스템 Waltham-Lowell system’이라고도 하는 “로웰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제조 시스템을 도입했다.

[2] 파추초 pachucho: 10대의 길거리 깡패, 특히 멕시코계 미국인을 의미한다.

[3] 주트 수트 Zoot Suit: 허리까지 올라오는 통이 넓은 바지와 두툼한 패드를 어깨 부위에 넣은 긴 코트를 입은 외양을 일컫는다. 1930-40년대에 걸쳐 아프리카계 미국흑인, 멕시코계 미국인 등의 사이에서 유행했다.

[4] Zoot Suit Riots: 1943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주트 수트를 착용한 멕시코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폭동. 1943년 디트로이트, 알라바마, 텍사스, 버몬트 등의 미국 각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이루어진 인종 폭동의 하나였다. 라틴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 기반한 이 폭동은 미국 군인들과 로스앤젤레스의 백인들은 주트 수트를 입은 젊은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고 1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5] 대퍼 댄 Dapper Dan(1944-): 뉴욕, 할렘 출심의 패션 디자이너, 주로 힙합, 스트릿웨서 등을 하이패션과 믹스매치하는 디자인을 선보였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구찌, 루이비통, 펜디 등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를 자신의 디자인에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