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Barker | 존 바커

판초. 당신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시간의 세계는 짜임새 밖에 있네요, 오늘밤 나를 위로해주세요. 오 토마스, 토마스 카타리Tomás Catari[1] 당신은 저들(스페인 세력 혹은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 중재자들)이 해야 한다는 대로 다 했어요. 저들의 언어로 글도 쓸 수 있었고 저들의 왕도 들을 수 있도록 말했죠.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2]의 사람들은 귀를 먹은 건지 아니면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백인과 메스티조mestizos[3] 무리는 여기 차얀타Chayanta에서 우릴 모욕하고 약탈하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약탈당했는지 당신은 진실을 말했죠. 그러자 저들은 당신을 죽였어요. 꼭 오늘처럼 태양이 높이 떠있던 날 당신을 죽였죠. 오늘 밤만큼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스하게 감싸주세요. 우리의 성인이 베푼 기적처럼 잠이 온다면 자고 일어나 다시 싸울 준비가 되어있을 겁니다. 미카엘라Micaela와 다른 형제들도 함께 모여 싸울 거에요. 당신의 붉고 푸른 짜임새는 나를 점점 잠들게 하네요. 미카엘라가 천을 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 우리는 첫 아이로 배가 많이 불러 있었고 함께 있어 행복했습니다. 사제가 우리가 죄를 지었다며 혼인하라 명령하기 전 까지는 말이죠. 죄요? 우리에겐 아닙니다. 혼인도 하기 전에 밤에는 침대에서 낮에는 함께 일하며 하루하루 서로를 알아 나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될 만큼 그들에겐 혼인이 큰 일이었던가요? 미카엘라의 아버지 마테오 초케Mateo Choque는 사제의 말이 옳지 않다고 반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삶의 방식이 있고 혼인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 죄로 벌을 받았습니다. 거리로 끌려 다니면서 자신이 멍청한 인디언이며 사제에게 반박한 죄로 처벌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자백해야 했습니다.[4] 나는 마테오의 수난을 듣고 목격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분노가 나의 마음에 지펴졌고, 살인에 대해선 아는 게 없던 나는 저들이 토마스를 죽였듯 살인을 했고 그날 이래로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우리 형제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밤은 내 몸을 촘촘히 감싸며 나를 잠들게 하네요.
토마스의 마음에도 분노가 있었죠. 블라스 베르날 Blas Bernal이 우리를 온갖 방법으로 약탈했고 그 약탈로 자신의 친구이자 스페인 사람이 알로스Alos의 도움을 받아 추장이 됐으며 알로스는 우리를 지배하는 것으로 돈을 벌었습니다.[5] 직함에 걸맞지 않은 그 족장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고 제 이름을 착취하는 데 썼습니다. 팔 수도 없는 쓰레기같은 것들도 우리에게 팔아내라고 어찌나 강요하던지. 아마 저 부자들은 1 페소라도 벌 수 있다면 사람도 죽일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가 글을 썼죠. 저들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었고, 우리도 우리 의무를 알고 있지만 착취나 학대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상황이 얼마나 온당하지 않은 지 설명했습니다. 우리 작물과 가축들에 세금이 부과 되어선 안된다고도 설명하며 편지를 썼고 이 때문에 마테오 초케처럼 벌을 받게 됐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울려 퍼진 말들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토마스를 해도 달도 오후의 빛도 없는 감옥에 가뒀으며 토마스의 마음엔 더 큰 분노가 깃들었죠. 그럼에도 맞서 싸우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누가 이기게 되든 결국 우리에겐 지는 싸움이라고. 하지만 아닙니다, 다시 글을 쓰게 될 거예요.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그가 맞았다고, 토마스가 옳다는 걸 알고 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죠.
이젠 너무 늦었으니 모든 것이 전과 같을 순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린 저들이 부르듯 멍청한 인디언들이 아니고 무엇도 확실치 않단 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곡물을 심습니다. 언제가 적기인지 판단하는 법을 조상들로부터 알게 되었죠. 곡물이 잘 영글거란 확신은 없어도 제때에 옳은 방식으로 씨를 뿌렸습니다.
토마스가 다시 수감됐을 때 우리가 “아니오, 그는 좋은 사람이며 진실을 말했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해야 했던 것도 잘한 일이었습니다. 늦지 않은 때에 포코아타Pocoata 마을로 가서 토마스를 데리고 함께 차얀타로 돌아와 우리의 삶을 영위하려 했고 이는 제때 일어난 옳은 행동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려면 돈이 필요해서 우리의 주인이자 귀족이 된 알로스가 우리를 잡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죠. 그러나 이미 저질러졌고 한번도 피를 묻혀본 적 없던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군인을 죽였습니다. 다시 보니 알로스도 별거 아닌 한 사내일 뿐이더군요. 우린 그를 체포하고 말했어요. 토마스가 너보다 훨씬 고매한 인간이란 걸 생각하면 적합한 협상은 아니지만 네가 토마스를 잡아 놓는 동안 우리는 너를 억류할 거라고. 그래요, 결국 우린 토마스를 데리고 함께 돌아왔습니다. 토마스는 이제 우리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살았 듯이.

당신의 온기를 내게 감싸주세요, 오늘 내가 끝없이 달렸 듯 멈추지 않을 내 마음에 기적을 일으켜주세요, 내일 일어나 토마스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지금 잠들게 해주세요, 온 세계가 제 것인 양 우리의 돈과 광산을 강탈해간 백인들과 그들의 메스티조 무리들을 믿지 않고 그들의 과오를 알아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토마스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당신의 다마소Dámaso와 니콜라스Nicolás 형제[6]들을 찾을 것이며, 그들도 미카엘라도 준비가 됐으니 우리는 라플라타La Plata[7]로 함께 가서 다 죽일 겁니다. 살인은 해본 적도 해볼 생각도 없었던 우리가.
포코아타에서 돌아온 토마스는 우리도 살아야 했던 방식 대로 살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법이 우리의 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법은 힘이 없을뿐더러 우릴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토마스는 우리를 학대한 자들은 살인에 능숙 하므로 그들을 죽이려 들지 말라고 했죠. 그들이 만약 살인을 시작한다면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이제 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 건 오직 두려움뿐이죠. 우리가 체포할 때만 해도 알로스는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그는 공포 때문에 더 이상의 군대를 보내지 말라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당시의 나는 저들이 평생토록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고 믿고 싶진 않았습니다. 우린 두 번 다시 억압당하지 않을 거라고, 우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아무 말도 듣지 않은 듯 돌아와서 토마스를 체포하고 수감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소극적이었다 해도 우리가 분명 목소리를 냈는데 말입니다. 알로스 한 명은 공포를 느꼈지만 사실 그의 부류들인 백인이나 사제들이나 저들처럼 살려 하는 사람들은 늘 더 많았던 것이죠. 우리 작물과 가축에 세금을 부과하며 우리를 가르치려 들고 꼭 오늘처럼 1 페소를 위해 사람도 죽이죠. 우리는 다시 토마스를 데리러 갔지만 치안 판사와 그의 사람인 광산 소유주 알바로Alvaro와 그의 세력들이 그를 살해했습니다. 우리는 분노에 차서 몇몇을 죽이고 겁에 질린 다른 인간들도 죽였습니다. 그저 두려움만 이해하는 이들은 도망가버렸습니다.


이제 내 마음도 머리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거나 도망가는 것을 보기 전까진 온통 혈관이 근질거립니다. 하지만 오늘밤만은 당신이 짠 천으로 나를 감싸고 흙 속의 감자처럼 따스하게 지켜주세요. 형제들과 모여 다시 싸우러 가기 전에 잠으로 데려가 주세요. 알바로가 우리의 땅에서 수천 페소를 파낸 광산으로 숨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순간 나는 무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에 화를 안고 따라갔습니다. 아마 멍청한 인디언들은 따라오지 못할 테니 광산이 안전할 것이라고 알바로는 생각했겠죠. 난 밖에 서서 토마스가 나에게 가르쳐준 언어로, 인디언들은 도망갔으며 라플라타에서 당신을 위한 상금을 가지고 왔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알바로가 나왔습니다. 1페소를 위해서라도 살인을 할 그 사람. 나는 바위를 들어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살인같은 건 몰랐던 나는 그의 머리를 거듭 박살냈습니다.

 

이 익명 안데스 토착민이 남긴 밤의 상념은 지금은 볼리비아령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관할이었던 곳에서 1781년 토마스 카타리가 사망한 날 밤을 배경으로 한다. 족장들 혹은 추장들은 토착 민족 단체와 스페인 왕(그리고 왕의 중재자)사이의 중재를 맡고 있었다. 토마스도 그중 한 사람이어야 했으나 식민지 파벌 싸움에 압력을 받고 있었다. 대신 토마스는 현존하던 식민지 법을 이용해서 그의 공동체를 보호하고자 했다.
위 익명 토착민은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서 카타리와 그 형제들과 뜻을 함께 하였고, 현재는 수크레Sucre[8]의 자리인 라플라타 공격에 나섰으나 카타리 형제들은 배신당했으며 당시 가장 참혹했던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이 토착민의 운명은 알려진 바 없지만 아마 다른 토착민 저항세력 전사들과 함께 라파스 포위 작전에 참여했을 것이다. 라파스 포위 작전은 바르톨리나 시사 Bartolina Sisa와 그의 파트너 훌리안 아파사 Julian Apaza가 함께 주도했는데 아파사는 카타리 형제들의 영광을 기리고 페루의 투팍 아마루 Tupac Amaru 혁명[9]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을 투팍 카타리Tupac Catari라고 이름지었다. 스페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라파스를 지켰다.

[1] 토마스 카타리Tomás Catari (1740.3~1781.1.15): 안데스 고산 토착 민족 케추아의 족장이자 저항 세력의 지도자였다.

[2] 1532년 잉카 제국이 붕괴되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후 페루 부왕령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리오데 라플라타Río de La Plata 부왕령으로 편입되었고 경제와 사법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식의 경제와 사법 제도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1780년엔 페루의 투팍 아마루 2세의, 1781년엔 아이마라인 투팍 카타리의 반란이 있었다.

[3] 메스티조인Mestizo: 스페인인과 북미원주인의 피가 섞인 라틴아메리카 사람.

[4] 1778년도 문헌에 따르면, 사제 도밍고 코르테스Domingo Cortés가 마테오 초케의 딸에게 결혼을 강제하였고 마테오는 그에 반대한 죄로 위와 같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5] 토마스 카타리는 시장에게 서신을 보내, 당시 볼리비아 마차Macha 지방 추장이었던 블라스 베르날의 공물 약탈행위를 신고하였고 항소법원은 베르날을 수확 업무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나 후임 시장 호아킨 데 알로스Joachin de Alos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6] 다마소Dámaso와 니콜라스 카타리Nicolás Catari 형제는 토마스 카타리의 사촌이며, 토마스 카타리 처형 후 항쟁의 주도권을 이어받아 페루 상부 지역의 다른 공동체까지 혁명을 확장했다.

[7] 라플라타La Plata: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도.

[8] 수크레Sucre: 볼리비아의 수도

[9] 투팍아마루 Tupac Amaru 혁명: 투팍 아마루 1세는 스페인의 정복에 대항하다 페루 부왕에 의해 1571년 처형된 잉카 제국 왕족이며, 200년 후 1780년 쿠스코 출신 원주민 지도자였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투팍 아마루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투팍 아마루2세로 명명했다. 당시 원주민들은 안데스 지역 광산에서 혹사당하는 처지였다. 투팍 아마루 2세는 스페인에 대항하여 운동을 일으켰고 정복자들에게 상징적인 보복을 했으나 1년 뒤 처형당했다. ‘투팍 아마루’라는 옛 잉카제국의 영화를 꿈꾸는 오늘날 토착민들에게도 상징적인 이름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