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The Indian leader Mohandas Gandhi reads as he sits cross-legged on the floor next to a spinning wheel at home, photographed in 1946. # Margaret Bourke-White / The LIFE Picture Collection via Getty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의식적으로 서양과 인도의 다양한 복식을 체험했고, [이후]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차르카charka(물레)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도 거리낌없이 인정했듯 1915년에 인도로 돌아올 때까지 간디는 차르카를 본 적이 없었고, 인도에 도착해서도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손으로 방추를 이용해 실을 뽑는 기술이 거의 사라져가던 시기였던 1908년부터 간디는 실용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도구로 손으로 직접 직조 짜는 홈스펀homespun[1] 직조활동을 지지하고 있었다. 사실 간디는 [한때] 차르카하르가kharga(베틀)과 혼동하기도 했다. 이 활동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 상징을 사용하면 자칫 발생할 수 있을 위험에 대한 교훈을 보여줄 사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차르카 자체가 실용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도 발전될 수 있었기에 위험을 상쇄할 수 있었다. 수백 년 간 인도는 품질 좋은 면직물 생산국이자 세계적인 수출국이었다. [그런데] 영국산 면직물이 인도에 상당히 침투했고, [이에] 인도의 수출시장은 큰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집에서 직물을 짜는 일이 반식민주의 정치에서 중요한 운동이 된 것이나, 19세기 막바지에 “손으로 베를 짜는 행위가, 이젠 사라져가는 시골의 공예를 인도의 윤리적, 정신적 재생산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옷이] 단순히 지위를 말해주는 대부분의 사회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상징적인 힘이 옷에 깃들어 있으며, “개인의 윤리적, 물리적인 본질에 변화를 주고, 그 본질이나 영혼을 흡수하여 수년간 간직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벵골에서 일어난 스와데시 운동the Swadeshi movement [2]은 이러한 생각들을 종합하여 실현해 낸 정치 캠페인으로 영국산 물품 불매 운동을 이루어 낸 것이다. 공장 기계식 제작에 반하는 ‘홈스펀’의 미덕을 실질적으로 구현함으로써 더욱 실용적인 방식으로 앞서 나간 간디는, 계급에 관계없이 한번이라도 실을 잦아 직조해본 적이 있는 수많은 무직 여성들에 괌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출판한 『영 인디아Young India』에서 1820년대 한 미망인이 쓴 편지를 소개했다. 그녀는 세 딸을 키웠고, 자신의 딸들을 무시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방적공으로 일하며 받는 소득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남자들과 결혼시켰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벵골 지역 신문인 사마차 다판 Samachar Darpan에도 실렸었는데, 여기에서는 급격하게 달라진 그녀의 상황이 잘 드러난다. “앞으로 3년 동안 우린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방직공들은 이제 전처럼 실을 잦으러 집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실을 팔면 원가의 사분의 일도 되지 않는 값을 받습니다.” 그녀는 이 일이 벵골 서부 빌라티bilati 외국 실 때문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 방직공 여성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그녀는 외국실이 그렇게 싸다면 그 실을 만든 여성들도 그만큼 무척 가난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간디는 그의 동시대 여성들이 다시 한번 “노동 제작 공정에 투입되어 인도의 생산력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스크리트의 중요 법전일 뿐 아니라 기원전 200년과 기원 200년 사이에 기록된 현생과 내세의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옛 법전이었으며, 복장 규칙들을 포괄하는 힌두교 사회의 실용 윤리 규범을 담고 있는 다르마 샤스트라Dharma Shastra의 저자이자 동명의 문헌이기도 한 마누Manu[3] 속 전설적 인물을 언급하면서 “여성의 고전적인 위치를 재확인”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한 간디는 ‘케인즈 식Keynesian’의 수익창출과 고용의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4]가 지역적으로, 특히 여성들에게 적용될 거라 생각했다. 이러한 간디의 생각을 실현해낸 사람은 바로 ‘진취적인 미망인’ 강가벤 무즈무더Gangaben Mujmuder였다. 1917년 무즈무더는 바로다Baroda 지방의 비자푸Vijapur에서 물레들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그곳에 방직 센터를 세웠다. 그의 또 다른 추종자 마간할 간디Maganhal Gandhi는 물레의 바퀴를 기술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공장에서만 직물을 제작할 수 있었던 시대에 방직공들이 집에서 직접 직물을 짤 수 있도록 가르친 것은 바로 무즈무더가 찾은 한 무슬림 방직공이었다. 방직공들은 집에서 카디khadi(손으로 짠 인도 무명) 옷을 만들 수 있었고, 이는 자급자족의 상징이 되었다. 특정 민족주의나 가공되지 않은 옷에 의지하는 그들의 전통의 측면에서 본다면 산스크리트 법칙과 힌두교가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방직공들은 반드시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즈무더는 간디가 더이상 “짧고 거친 도티dhoti(인도 남자들이 몸에 두르는 천)를 입어야 하는 건” 아니도록, 훨씬 폭이 큰 카디khadi제작법을 고안한 사람이기도 했다. 카디로 만든 도티와 모자는 반식민주의를 표현하는 의상이었고 영국인들에게도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벤 람지Gangbehn Ramji라는 또 다른 여성은 카디 도티khadi dhotis 제작의 전문 교육자가 되었다. 반면에 간디는“물레에 대한 연구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우리는 수십 개의 물레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린 이제 기계적 제조법에 숙달한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며 본인이 갖고 있던 사상과는 상충되게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1] 홈스펀Homespun: 집에서 소박하게 손으로 짠. 또는 그렇게 만든 거친 모직물.

[2] 스와데시 운동 Swadeshi movement은 20세기 초 인도에서 반식민주의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국산품 애용 운동이다.

[3] 마누Manu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 <샤파타파 브라마나>를 비롯하여 서사시 <푸라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만물을 휩쓸어버린 대홍수가 지나간 뒤 마누만이 살아남았다고 전해지며, 최초의 법전인 <마누법전>의 창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4]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는, 경제 현상에서, 어떤 경제 요인의 변화가 다른 경제 요인의 변화를 유발하여 파급효과를 낳고 최종적으로는 처음의 몇 배 증가 또는 감소로 나타나는 총 효과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