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n 리넨

방적실은 15세기에서 17세기 후반까지 독일 마을에서 원사(原絲) 생산을 위한 중요한 중심지였다. 여성이 우위에 있다고 인식된 세계에서는 성적 문란과 무질서가 만연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무자비함과 용감함을 표현하기 위해 긴 기장의 리넨 셔츠를 입었다.” 원사와 그 원사로 짠 옷감인 리넨의 원 재료인 아마(亞麻)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직물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기원전 8000년의 아마 조각들이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수천 년 동안 [아마 생산은] 자급자족하는 ‘소작농’ 경제인 카우프 Kauf 라는 체제의 일부였는데, 카우프는 ‘새로운 세계 New World’의 노예들에게 입힐 옷을 만들기 위한 ‘오스나브뤼크 Osnabruck’ 천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만들어낸 노동의 분업과 함께 ‘반출 putting out’ 시스템인 페어라그 Verlag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 자율성을 훼손하고 철저한 자본주의 규율이 되기 위해 체계적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세계 최대의 리넨 생산국이 된 아일랜드 북부 지방 은 기술이 발전하고 공장체제로 전환하던 19세기 이전부터 변혁의 실험실과도 같았다. 16세기 말, 아일랜드를 방문한 한 영국 여행자는 원주민의 풍요로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일랜드 원주민들은 샤프란으로 염색한 30엘에서 40엘 길이의 셔츠를 입었다.”[1] 엘은 1야드[2]를 조금 넘었다. 18세기 중반까지 리처드 콕스 경 같은 ‘기업가적’ 식민지 지주들은 리넨을 사업화 하기 위해 사회 통제 시스템을 정교하게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토착인들의 달력이나 의례, 축일 등을 지키지 않게 되었고, 생산자를 위한 풍요 개념 역시 사라져 갔다. 하나의 예로 노동절은 ‘포상’의 날이 되어 공개적으로 보상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는 지역 주민들을 그들의 “일정하지 않은 기술수준”과 근면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노동인력actor로 만들었고,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 크게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부리는 술수machination도 경계해야 했다. 콕스는 그것이 “가게에서 쥐를 기르고 아끼는” 치즈장수와 같은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식민지적 사고방식은 평점제credit에 의해, 그리고 [평점을 받게 될] 잠정적 수혜자들이 아마나 린넨 생산을 위한“노동에 헌신”할 것이라는 생각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조각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영국이 식민지 의 토지를 횡령하자, 여전히 성장가능성이 있었음에도‘새로운 땅’의 감자 수입[4]때문에 더 의존적이게 된 아일랜드 농촌 인구가 만들어졌다. 1662년 토지 횡령은 협조적이지 않은 직공들의 아마와 직물 몰수, 잉글랜드에서 온 개신교 이민자들에게 주어지는 법적 특권, 아일랜드산 양모에 대한 큰 금액의 수출세 부과에 의한 양모 산업의 파멸, [그리고] 리넨에 대한 관세 보호에 의해 더욱 가속되었다. 이 모든 일은 그 유명한 위그노 망명자이자 아일랜드 리넨 산업을 창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리넨 전문가 루이 크롬멜린 Louis Crommelin이 도착하기 이전에 일어났다. 이 때부터 땅 없는 부랑자에 대한 복지(자비)는 해로운 것으로 묘사되고, 리넨을 생산할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악랄한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또한 여기에는 생산과 관련된 젠더 엔지니어링을 포함되었다.

방적은 병목현상처럼 보였다. 한 명의 방직공이 작업하기 위해서는 8명의 방적공이 필요했다. 리차드 콕스 경과 같은 초기자본주의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이  긴 섬유질을 파쇄하지 않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마 생산의 마지막 단계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작업을 하도록 했다. 남성들이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 “인위적인 나약함 artificial weakness을 배울” 필요는 없었다. 방적의 경우, 여성 노동력을 어디에서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는 쉽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홀란트에서는 혼자 있는 여성을 평온한 미덕의 전형으로 재현하는 반면 무리 지어 있는 여성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거칠게 표현하였다. 아일랜드에서는 가정에 있는 젊은 여성들을 ‘제멋대로’인 것으로 여겼고, 그들은 게을러서 ‘울타리에 구멍을 내고, 과수원에서 도둑질을 하거나 아버지를 거지로 만든다’고 여길 정도 정도였다. 반면에 이웃들이 빛과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한 장소에 모여 갖는 수작업 방적 ‘모임 bees’을 갖는 것은 큰 즐거움과 관련이 있었으며, 개신교와 카톨릭의 위계질서에서 볼 때 여성이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 다니는 것은 대단한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이상적인 해결책은 여성들이 성과를 내기 위해 분투했던 방적 기관에 있었다. 각 여성의 노동의 집약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소였던 작업장과 고아원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공간들은 공장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공장 규율을 적용하고 있었으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에서는 1811년에도  여전히 손으로 리넨 원사를 방적할 수 있었고, 아일랜드 북구에서는 [손으로 짠 리넨 원사가] 잉글랜드의 기계에 의해 생산된 똑 같은 재료들보다도 더 싸게 팔릴 수 있었다.

[1]  샤프론으로 염색된 아일랜드 셔츠

[2] 1야드는 0.9144 미터에 해당한다.

[3] Cox’s promotion scheme included an overhaul of the ritual calendar; he discourages his tenants from celebrating their traditional feast days and transformed May Day into “the joyous season of Determining the Premiums”(1749:32) Then, a full assembly gathered for the applauses and demerits that each deserved. In determining who got what, firsthand “Acquaintance” and “Observation” were essential, for it was cox’s view that the “Undertaker must attend personally the growth of the Undertaking” (1749:48) He should not “receive Reports from others; for those will often be partial, though Love, Malice, or Envy…”  from Cloth & Human Experience

[4] 새로운 땅. 감자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