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cho Huayruru

독일령 식민지 토고의 한 면화 수집소.

 미국 앨라배마주의 흑인학교인 터스키기 공립 학교를 졸업한 존 W. 로빈슨 John W. Robinson 은 독일이 식민지배하고 있던 토고에 목화 재배학교 및 실험 농장을 개설한다. 터스키기는 부커 T. 워싱턴 세력이 탄탄한 지지를 받는 지역으로, 그는 노예로 태어나 19-20세기 전환기의 미국 흑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895년 애틀랜타 연설에서 그는 인종차별적 짐 크로 법 Jim Crow laws을 감내하면서도 흑인의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또한 목화에 기반한 ‘새로운 남부 New South’의 미덕을 선언했는데, 이는 노예제를 대체한 소작제도 아래에 고도로 훈련된 노동력들 곧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채집 기술에 의존한 것이었다.

한편 아프리카 토고 남부에서는 이미 에우족Ewe이 자생적으로 목화를 재배하고 있었고 지역 시장에는 “매우 내구성이 강한 면직물”이 있었지만, 수출 사업으로 하기에는 섬유 가격이 너무 높았다. 오직 여성만이 목화를 재배하고, 솜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로 뽑아, 그 방적실을 남성인 직조공에게 팔았다. 일부일처제가 아닌 관계에서 이는 여성에게 독립적인 수입이 있음을 의미했다. 독일 식민주의자의 눈에는 여성 중심의 가정에 너무 큰 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정책협회Verein für Sozialpolitik 연구소의 인종주의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던 식민주의자들은 매우 초기부터 목화 농업의 이러한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했다. 다른 유럽인들이 그랬듯이 그들도 “대미(對美) 면화 문화투쟁 Kulturkampf”을 외치며 미국의 면섬유 독점을 와해시키고 싶어했다. 이는 중대 사업이었다. 1900년까지 독일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면화 생산국으로서 업계에 40만 명이 종사했지만, 원면(原綿) 가격의 빠른 상승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칼 헬페리치 Karl Helfferich 는 “유럽 면화 산업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식민지에서의 생산뿐 이라고 주장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시도한 대농장제는 결과적으로 임금 노동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과 그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발생시켰다. 토고에서는 [대농장제] 대신 명목상으로는 자유농부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세계 시장에 내놓을 면화를 생산하지만 만약 농부들이 생산하지 않을 시에는 생산을 강요하는 폭스쿨투어 Volkskultur[1]를 만들고자 했다. 경작 및 노동 규율에 있어서의 현대적인 방법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면화 생산에 기여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경작으로의 전환과 이에 필요한 육체적 힘은 여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식민-가부장적 꿈인 부르주아 가정상을 사회 규범화 하기 위한 초석을 놓을 것이었다. 

부커 T. 워싱턴이 “당신들은 우리가 남부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목화만 기르도록 가르친 그 실수 말이다.” 라고 경고했음에도, 독일 사회정책협회 멤버들은 터스키기 및 부커 T.워싱턴 주변 그룹과 맺은 연계를 통해서, 그 방면 전문가인 미국의 ‘니그로 Negro’가 토고 남부인들이 세계 면화 시장의 생산업자가 되기 위한 완벽한 롤 모델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독일인들은 터스키기 학교 졸업생들이 식민지 당국을 존중하며 씨앗과 전문지식을 가져와서 농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01년 네 명의 졸업생이 도착했고 여성들이 사용했던 괭이를 대신할 쟁기 역시 가져왔다. 사람들은 쟁기를 보고 열광했으나 쟁기를 끌게 한 여러 동물들이 모두 체체파리 때문에 죽었다. 그리하여 ‘전문가들’ 중 한 명인 캘로웨이 Calloway는 남자들이 동물 역할을 맡아 쟁기를 직접 끌게 했으며 이는 하나의 표본, 즉 식민적 진보의 잔인한 아이러니가 되었다. 면화의 수출이 증가하고 여성의 힘은 약해졌으나, 1904년이 되자 식민지 권력은 모범적인 ‘니그로 Negro’ 농부들의 방식을 버렸고 그 대신 앞서 말한 네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존 로빈슨 John Robinson이 노스테 Nosté에 토고 면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합리적 목화 농사를 가르치는 3년 과정이었으며 식민지의 모든 구역에서 학생들을 보내야 했다. 학생들은 ‘자유’ 농부가 되기 위해 그곳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터스키기 학교와 달리 식민 당국은 그들이 학업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다양한 비공식적인 저항 전략을 사용했는데, 식민지 개척자들에게는 타고난 ‘나태함’ 탓으로 치부당했고, 자국민들 사이에서는 위신을 잃었다. 이들이 위신을 잃는 것은 가부장적 가정 모델을 만들어 내고자 한 식민지적 목표를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독일의 감독을 받는 모범 농장 생활에 배우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외롭고 불쌍한 젊은이들”을 적잖게 배출했다. 초기부터 가격보증제, 터스키기 농가에 의해 개발된 전문종자, 철도 건설 등을 활용하여, 1909년까지 면화 수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다가 이후 차츰 감소했다. 로빈슨은 워싱턴이 처음부터 공언했던 방침에 의거하여, 목화는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 것이지만 “사람들이 오로지 목화만을 쫒아 살 수는 없다 … 그들은 목화와 얌을 더 잘 기르도록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식민지배 체제에서 열외의 처지에 놓였다. 사실 토고의 농부들은 언급될 필요조차 없다. 철도, 시장, (너무나 낮았던) 가격 보증은 재배자들이 자급자족 농사를 포기하고 단일재배 생산을 하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단일재배 생산은 더 노동 집약적이면서도 추가 보상은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의 영국 경우와 달리 독일 식민주의자들은 과세와 신용 거래의 착취적 시스템을 통해서 강제력을 제도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 시장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