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ile Fragment 

바이엘 컴퍼니의 특허 받은 주홍색scarlet 광고는 의식적으로 현대적이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멋진 기사들의 전통적 세계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다. 또한 1876년 필라델피아 국제박람회에 참가하여 받았던 메달을 보여주는데, 이 전시회는 “일반적으로 콜타르 색상의 아름다움”으로 칭송되었다.

나스카 Nazca. 400CE 추정. 1978년 쿠스코에서 수집, 개인 소장품, 아카이브에 대여.

이것은 튜닉의 한 조각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직물] 조각의 생산에 엄청난 양의 수공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한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7킬로미터의 서로 다른 색깔의 실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이 [직물] 조각은 금이나 은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때때로 다른 문화권에서 [이 직물은] 명예를 의미하는 로브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금실의 가격이 로브의 라벨 위에 꿰매져 있었다. 그 직물은 두 개의 울 판넬을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스페인 침공이 있기 전까지 안데스는 독자적인 예술을 발명한 고립된 세계였다. 나스카 2단계에서[1] 씨실과 날실의 인터로킹interlocking 기술은 최대의 발전을 이루었는데, 여기서 “씨실과 날실은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이동하지 않고 특정 색상 영역만 왔다 갔다 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적이다”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원리는 태피스트리와 유사하다. 단, 디자인의 각 섹션의 가장자리에서 씨실과 날실 모두 색을 변경하여 동일하게 가시화한다는 점은 제외하고 말이다. 나스카 문화의 발전은 친차Chincha, 피스코Pisco, 이카Ica, 나스카Nazca, 로마스Lomas의 계곡에 있었다. 각 구역은 직물에 있는 사람, 동물, 식물을 고도로 양식화한 표현법을 가지고 있었다. 악기와 마찬가지로 성별 역시도 재현되었다.

이는 강한 종교적 성격과 위대한 천문학자들이 별들의 움직임과 별자리들에 대한 뚜렷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문화였다. 나스카 팜파의 장대한 지상화에서와[2][2] 같이 이것들은 동물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안데스 직물은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연속적인 씨실과 날실의 기술이 특징이다. 남미의 안데스 직물 전통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섬유 역사를 갖고 있다. 섬유 예술은 대략 기원전 10,000년부터 이 지역에서 존속되어 왔다. 직조기 직물은 페루 북부의 전 세라믹 시기(기원전 3000-1800년)에 처음 등장한다. 초기 지평선 시대 Horizon Period(기원전 1800-0년)까지 거의 모든 기법을 사용한 직조기로 짠 직물이 볼리비아, 칠레, 페루의 남쪽 고지대와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초기 중간기(0-500 CE) 안데스 직물 전통은 불연속적인 씨실과 날실 기법을 추가하고 자수에 초점을 맞춰 완전하게 발전했다. 중기 지평선 시대(500-800 CE) 동안 직물은 알려진 거의 모든 직물 구조에서 사용되었다. 좋은 직물은 주로 남부 안데스 지방의 인터로크 태피스트리 기법으로 짜여졌다. 낙타과 섬유(알파카, 라마, 비쿠냐)와 목화가 모두 사용되었고, 독특한 기후 조건 때문에 이 고대 직물들 중 매우 많은 수가 살아남았다.

[1] 나스카 문명은 일반적으로 프로토 나스카 (1단계, 100BC ~ 1AD), 초기 나스카(2~4단계, 1~450AD), 중기 나스카(5단계, 450~550AD), 후기 나스카(6~7단계, 550~750AD)로 나뉜다.

[2] 나스카 라인 Nazca Lines: 페루의 나스카 팜파 지역의 사막에 넓게 펼쳐져 그려진 수십 개의 거대한 이미지들로 대개 양식화된 동물의 형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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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 예술은 대략 기원전 10,000년부터 이 지역에서 존속되어 왔다. 직조기 직물은 페루 북부의 전 세라믹 시기(기원전 3000-1800년)에 처음 등장한다. 초기 지평선 시대 Horizon Period(기원전 1800-0년)까지 거의 모든 기법을 사용한 직조기로 짠 직물이 볼리비아, 칠레, 페루의 남쪽 고지대와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초기 중간기(0-500 CE) 안데스 직물 전통은 불연속적인 씨실과 날실 기법을 추가하고 자수에 초점을 맞춰 완전하게 발전했다. 중기 지평선 시대(500-800 CE) 동안 직물은 알려진 거의 모든 직물 구조에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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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pite its biblical link to the Whore of Babylon, it replaced purple as the colour for the cassocks of Roman Catholic cardinals in the 13th century. Later this then provided extremist Protestants with the material to talk of the ‘scarlet whore of Rome’ and it continued popular life as the colour of ‘loose’ women.

주홍색은 성서에서 바빌론의 창녀와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 로마 가톨릭 추기경들의 캐속[1]cassocks의색이었던 보라색을 대체했다. 후에 이 연관성은 극단주의 개신교인에게 ‘로마의 주홍색 창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했고, 이는 ‘문란한’ 여성들의 색으로 대중적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 16~17세기경 유럽의 보병이나 기병이 착용한 무릎길이의 승마용 외투. 17세기 후반에는 일반 남성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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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rike which began with the destruction of the hated company store and against ‘identification’ passbooks containing the disciplinary history of each textile worker in Pueblo, Mexico was met with bloody repression, but was the start of a wave of empowering strikes continuing through the Mexican Revolution.

파업은 멕시코 푸에블로에서 각 섬유 노동자들의 징계 이력이 담긴 ‘식별’ 장부에 반대하며 증오하는 회사의 상점을 파괴하며 시작되었다. 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탄압에 부딪쳤지만, 멕시코 혁명을 통해 계속되는 세력화 파업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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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gs then got really out of hand as her sister called for a shamanic conference in Germany. Their verdict was serious. I must send all the textiles back to the Andes or burn them on the bank of a river. I must do this, was the agreed opinion, because my life was under threat from spirits in the textiles. They did not want to be in Austria and were directing their aggression towards me.

그 후 그녀의 여동생이 독일에서 무속 회의를 소집하면서 상황은 정말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평결은 심각했다. 나는 모든 직물을 안데스 산맥으로 돌려보내거나 강둑에서 태워버려야 했다. 직물에 대한 신념때문에 내 삶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직물을 없애야만 했다. 그들은 [그 직물이] 오스트리아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들의 공격성은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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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th Noack | 루스 노악

피나포어[1]Pinafore. 그 소포는 비엔나를 거쳐 어딘가에서 도착하는데, 그 곳에서 개봉되어, 내용물을 꺼내고, 이송되고, 평가(감정)되고, 잠깐 동안 어루만져진다. 다시 되돌려 놓을 때가 될 때까지, 포장지에 넣고 상자에 묻는다.

나는 어딘가에 있던 적이 없다. 어떤 장소와 상상에만 존재하는 관계는 불충분하다.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백은 추측이나 예상이나 연구에 의해 색깔이나 소리, 도표와 이야기로 바뀔 수 있는 잠재성이다. 나에겐 아니다. 나는 그 빈 공간에는 갈 수 없다. 내가 어딘가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손가락을 데일 수도 있다…”). 나와 어디엔가 사이에는 비엔나와 소포 두 가지가 위치해 있다. 비엔나에 가본 적이 있다. 내가 아는 비엔나. 그녀가 사는 곳이다, 그녀가 소포를 나에게 보낸 곳이다. 비엔나(그리고 그녀)는 내 환상에 동반된다. 그들은 내가 함께 살기에 꽤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유령들이다. 반면에 소포는 단순히 존재한다. 소포는 어느 날 내 문 앞에 나타났고, 지금은 내 앞에 앉아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다. 소포를 연다. 바로 그거다. 앞치마가 들어 있다.

그 앞치마들은 그녀에 의해 어루만져 졌을 것이다. 다른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녀는 앞치마들이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앞치마는 프릴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확실히 프릴이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것들을 푸는 동안, 앞치마는 종이 꽃처럼 열린다. 풀을 먹인 주름 장식들은 스스로 수명을 연장하며 호흡을 시작한다. 아니면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그 순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 이런, 그들은 평범하다. 심지어 그들의 무늬도 평범하다. 키치하지도 않고, 개념적이지도 않다. 나는 그 패턴들 속에서 비밀도, 의미도, 유산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촐라Chola[2]“나 “중국산”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그들이 중얼거리는 “패턴”뿐이다.

그리고 색깔들을 보라. 저것이 진짜 색깔인가? 진흙투성이의 갈색, 값비싼 천연 섬유와 쉽게 어울리는 흙빛 톤은 어디에도 없다. 시커먼 땅에 맥없는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치 그들이 너무 많이 씻은 것처럼. 심지어 분홍색조차도 회색처럼 보인다. 나는 다른 연상들로 날아간다. 일본인들, 아무리 따분한 옷감이라도 아름다움을 찾는 재주가 있지 않은가? 만약 내가 그들의 관점을 가진다면, 나는 …할 것이다. – 아니, 아직 뭔가 이상하다.

원단을 보자. 플라스틱이 아닌. 확실히 면이다. 얇지만, 화려하면서 속이 들여다 보이는 예복, 레이스 행커치프나 베일과 비슷할 정도로 얇지는 않다. 오히려 저렴한 정도로 얇다. 이런 앞치마에 손을 말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리기 전에 젖은 손. 그리고 그 후에 젖은 손에 환멸을 느꼈다. 공산주의 시절 이런 수건이 생각난다. 녹말이 씻겨 나간 후에도 전혀 쓸모가 없다. 잠깐, 이웃집 부엌에서도 봤다. 벽에는. 장식용 수건. 사과와 새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천천히, 새벽을 이해한다.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 지금쯤이면, 나는 모든 포장을 풀고 앞치마들을 내 주위에 펼쳐 놓았다(방은 에이프런으로 가득 찼다!). – 그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그 흐트러진 새들로부터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나는 그 불쌍한 것들에 투영하고 있지만, 우리 사이에 분명히 유대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앞치마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구식’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훨씬 더 빈틈없는: “피나포어”이다.

두 개의 결연한resolute hand 손이 나타나서 뒤에서 피나포어를 잡고, 세게 흔들어서 프릴과 접는 순서를 만든 다음 조심스럽게 몸 앞에 놓는다고 상상해보라. 홀터는 목 위로 넘어가고, 끈은 중간에서 묶이고, 완벽하게 매듭이 지어지며, 나비매듭은 뒤쪽/앞쪽을 중심으로 한다. 휴식을 취하기 전에, (이전의 세척때문에 아직 붉은) 양손은 피나포어에 마지막 주름을 주어, 그것으로부터 모든 의지의 찌꺼기를 바로잡고, 거기서 끝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녀는 소녀였을 때 두 벌을 입었다. 하나는 일상의 일부였다. 그것은 옷을 먼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누군가는 남자들의 더러운 접시를 식탁에서 치워야 한다. 소스가 솜에 스며 들며 흘러간다. 젖은 손(또는 더러운 손)은 정말로 반복적으로 건조(또는 세척)이 된다. 어쩌면 몰래 앞치마의 귀퉁이에 코를 풀었다 그리고 일요일이 왔다. 옷을 갈아입었다. 다른 하나를 옷장에서 꺼낸다.  좋은 것. 그게 더 편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더 좋은 옷은 목을, 너무 예쁘다, 오 너무 예쁘다…! 그리고 새 앞치마도 놓여있다(고정되어 있다).

아아, 명절(쉬는 날)에도 접시는 치우고 씻어야 한다. 집안일이 끝났으니, 여자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놀러 나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 소녀가 그녀의 예쁜 앞치마를 잘 유지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옷은 긁힌 드레스와 함께 일요일에만 입는다. 어떡해, 어떡해? 그녀의 어른들은 일을 바로잡는 법, 영혼을 잘 으스러뜨리는 법을 안다.<원문>  일요일에는 앞치마를 두 개씩 입고, 새 것 위에 더러운 앞치마를 입고, 악으로부터 그것 그리고 옷과 그 밑에 있는 몸 을 보호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소녀가 여자로 성장했다. 그녀는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요리를 한다. 쾌락은 기껏해야 한 팔 거리에 있다. (자신을 속이지 마라: 이런 것들은 결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녀는 그녀의 실크 바지를 좋아한다. 얼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나는 피나포어를 입고 있는 여자들을 상상한다. 내 판타지에서는, 그녀들은 자존심이 강한 여성다움으로 자신을 꾸민다. 그들의 의복은 그들의 몸을 장식하는 것 이상이다. 매듭이 묶이고 접힌 주름이 평평하게 될 때, 그들의 몸은 동그랗고 스스로에게 진짜가 된다. 그(피나포어) 밑에 가려진 허벅지가 아니라, 어루만져지는 것이 진정한 원단일까. 그녀는, 나도 안다, 욕망이나 동정심 때문에 어루만지지 않는다. 그녀는 여자들이 피나포어를 입은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생각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녀는 세련됨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피나포어가 예쁘다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피나포어의 많은 부족함(실용성이 부족하고, 미적 기교가 부족하고, 현재 의도된 유저십이 부족한 것)이 그녀를 은근히 기쁘게 한다. 그것들은 자율적인 것이다. 현재로서는.

[1]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덧입으며, 소매 없는 에이프런 형태의 옷이며, 가슴바대를 어깨끈으로 연결한 점퍼스커트이다. 주로 어린 소녀들과 여성이 많이 입는다.

[2] 스페인계와 아메리카 원주민 피가 섞인 라틴 아메리카 여자


Remix | 리믹스

볼리비아의 시인 하이메 샤엔스Jaime Saenz[17]가 옷감 스크랩으로 만든 아파라피타스 자켓을 입고 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부유함을 뽐내는 행동은 의복에 과도하게 많은 벨벳 천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 방대한 양의 벨벳은 쓰레기 더미로 향할 운명이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모두 벨벳을 아껴서 사용했고, 신발이나 지갑, 방한용 토시, 옷의 가장자리를 제작할 때 재사용했습니다. 대단히 견고하게 조직되어 있는 금색 바탕의 벨벳은 가장 작은 조각에 사용했고, 버려진 옷에 떼어 내서 다른 품목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나바호족Navajo[1]의 축복받은 방직공들은 멕시코의 스페인 군인 담요에서 실을 뽑듯 상업용 플란넬flannel천인 바예타bayeta[2]천에서 붉은 실을 풀어냈고, 다른 색실과 엮어 짜서 방적기를 돌렸다. 멋진 색을 다양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붉은색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물러나보면 바예타 천의 기원은 캐나다의 잉글리시 베이English Bay(올이 거칠고 성긴 모직물)이다.  바예타 천은 스페인으로 수출되어 현지의 풍부한 코치닐을 공급받아 붉은색으로 염색되기도 했다. 1746년 북아메리카에서 이 바예타 천이 광고되었고 상용화가 시작되었으므로 북아메리카에 사는 나바호족은 바예타를 공급받기 쉬웠을 것이다. 서아프리카 요루바Yoruba와 에도Edo의 직공들은 수입 직물에서 풀려나온 털실로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의 양단[3] 무늬를 짜고 현재 가나Ghana에 속하는 아샨티족Asante[4] 고위층을 입힐 켄테kente[5] 의상을 만들어냈다. 태피터taffeta[6] 옷감과 여타 해외 직물 수입에 의존해서 실을 뽑아내는 데에 사용했다.

특정 격자무늬로 짠 수직(手織) 인도 마드라스Madras 무명 천은 19세기부터 영국을 통해 나이지리아Nigeria로 유통되었고 나이젤 델타 삼각주Nigel Delta[7]의 칼라바리Kalabari족 사람들에게서 큰 호평을 샀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이 천에서 하얀색이나 밝은 색의 실을 뽑아내는 “뺄셈의 디자인design by subtraction”을 추가했다. 바늘과 레이저 날을 이용해 실의 마지막단을 끌어올려 잘라내고, 짧아진 실을 끌어당겨 천에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 방식을 통해 마드라스 천은 칼라바리족의 전통 옷 필리트 바이트pelete bite[8]로 변신했다. 이 옷을 귀중한 상품으로 여기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착용했다.

현대 마야 여성들은 ‘취미삼아 손으로 만든 브리꼴라쥬bricolage’ 섬유를 “종종 우아함보다 독창성을 가미하여 짜고 구획별로 효과를 나눠 구성했다. 양모와 생 목화, 아크릴과 금속 합성실, 인디고와 아닐린염료aniline dye, 리크랙rickrack[9], 레이스, 거즈와 폴리에스테르 등을 사용했다. 이는 ‘임시로 만든 것’ 그 이상이다. 여성들의 직조활동에서 일어난 의도적인 ‘전용appropriations’이며 이들의 즉흥 창작은 어떤 경우 문화적인 전복이 되기도 했다. 그와 유사한 것으로, 치리구아노 과라니 부족Chiriguano guarani[10]의 농업축제는 크리오요인Criollo[11] 카니발과 함께 이루어졌다. “고유성과 시적인 면모를 잃지 않은 채 이질적인 상징으로 가득한 제의를 통하여 [그들의] 사회적 연결고리와 소유권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가면은 아라와크Arawak 차네Chané족의 제의에서 썼고 실크 모자top hats는 식민지의 산물이었으며 의상은 안데스의 영향을 받은 메스티조 의상이었다. 치리구아노Chiriguano족, 크리오요Criollo인, 안데스 풍, 니바크레Nivaklé 족[12],  렝구아Lengua[13]족, 메노나이트Mennonite[14] 교회 풍으로 장식품을 꾸렸다. 몇몇은 재규어 호피와 왜가리 깃털, 카라구아타caraguatá 섬유로 만든 천과 더불어 오토바이 장갑, 가발과 색안경들까지 동원하여 변장했다.

매의 날개로 장식한 암홍색 나무 가면은 꼴라쥬와 같았다. 잡지에서 오려온 얼굴과 야생 들고양이의 털로 만든 마스크, 멧돼지pecarí나 들판의 사슴들이 판자, 플라스틱 소재의 다른 재료와 모여서 가면위에서 어우러졌다. 선조와 신화 속 야수들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배트맨Batman과 이티E.T와 축제를 나누었다. 브라질 중심부 카야포Kayapo족[15]의 오 네크렉스õ nêkrêx는 장식품 혹은 개별적으로 상속된 특정한 권리를 뜻하며 매우 존경받는다. 다른 부족에게서 유래한 것일지라도 치장의 혁신은 그 창작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화재로 한 동네가 전소된 후 중요 의식 마지막 무용에 써야 하는 깃털 머리 장식이 사라졌다. 그 장식이 없으면 수치스러운 쇼가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시내에 가서 다양한 색의 플라스틱 빨대를 구매해 머리장식을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멀리서 보면 아카족áká의 깃털 머리 장식처럼 보였다. 장식을 만들 독점적인 권리는 유산과 같이 상속되었지만 그래서 아카족의 장식은 아카족이 만들 수 있지만 만일 누군가가 충분한 깃털이 없거나 단순히 새로운 모습으로 꾸미는 걸 좋아한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권리를 ‘빌려’주곤 했다.” 

1970년대, 라파스의 아파라피타스aparapitas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남성은 모든 색과 모양과 재질의 옷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 펠리페는 엄지손톱 만큼 작은 조각부터 손만큼 커다란 것도 보았다. 벨벳, 헤센hessian[16], 플란넬, 실크, 마루걸레, 모직물, 캔버스, 고무, 데님, 삼베, 샤모아 가죽, 리넨과 유포로 된 조각들이 있었다. 동그란 것, 네모난 것, 세모난 것, 다각형으로 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완벽히 들어맞으며 어떤 것은 흉하고 또  어떤 것은 깔끔했다. 그러나 모두 매우 꼼꼼하게 바느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실, 마포, 전선, 신발끈, 줄, 가죽으로 만든 실과 선 등 아주 다양한 재료와 함께 사용했다.

피노체트Pinochet[18]군부 시절, 산티아고 데 칠레Santiago de Chile의 빈민가 여성들이 면 조각과 낡은 옷 조각으로 아필라arpilleras[19] 자수를 놓았다. 아필라는 교회에서 판매했다. 사람들이 이 자수를 사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여성들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고충들을 수놓았고 그 고충들은 보기 흉한데’ 사람들이 구매를 하자 놀라워했다.

[1] 나바호족Navajo 북아메리카 대륙의 남서부에 주로 살고 있으며 인디언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한다.

[2] 바예타bayeta: 올이 촘촘하지 않고 느슨한 양모. 걸레를 뜻하기도 한다.

[3] 양단: 금, 은색 명주실로 두껍게 짠 비단.

[4] 아샨티Asante;Ashanti: 서아프리카 황금해안의 왕국 및 부족 명칭. 가나 남부와 토고, 코트디부아르 지역에 산다. 아샨티 왕국은 1695년경 오세이 투투(Osei Tutu, 재위 1697~1731)가 삼림지방의 부족을 통합하여 세운 왕국이며, 18세기에 연안부 유럽인의 상업상 근거지로 발전, 1901년 영국이 멸망시킬 때까지 존속했다. 화려한 색의 천을 생산하고 그 천으로 가나의 전통 의상을 만든다.

[5] 켄테Kente: 아프리카 가나의 남성이 착용하는 고대 로마의 토가와 비슷한 화려한 색무늬의 감는 옷.

[6] 태피터Taffeta is a crisp, smooth, plain woven fabric made from silk or cuprammonium rayons as well as acetate and polyester. The word is Persian (تافته) in origin …

[7] 나이젤 델타Nigel Delta: 나이지리아 남부의 삼각주, 아프리카 최대의 석유생산지. 토착 민족은 칼라바리 Kalabari 족이다.

[8] 필리트 바이트pelete bite: 칼라바리의 이조Iijo족이 만드는 천. Pelete는 ‘실을 자른다’, Bite는 옷이라는 뜻이다. 천을 조밀하게 짜서 실을 잘라 올을 빼서 구멍을 만든다.

[9] 리크랙rickrack: 어린이 옷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지그재그 모양의 납작한 끈.

[10] 치리구아노Chiriguano: 남아메리카 중부의 아르헨티나·볼리비아·파라과이에 걸친 광대한 평원 그란차코 Gran Chaco에서 활동했던 토착민족들 중, 볼리비아에 거주하는 과라니Guarani부족의 한 계열.

[11] 크리오요Criollo: 아메리카 대륙의 에스파냐계열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식민지 사회에서는 인디오·흑인·여러 혼혈집단을 지배하는 특권계층을 형성하였으나, 식민지 관료기구나 교회조직에서도 현실적으로는 페닌슐러와 명확히 구별되어 차별대우를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말기에는 지방관료, 하급성직자, 상인계층으로서 식민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독립혁명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유럽에 강하게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형성된 독립국가에서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백인 아닌 여러 집단은 사회적·문화적으로 차별 대상이 되었다.

[12] 니바크레Nivaklé: 그란차코의 토착민족 중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에 주로 사는 부류.

[13] 렝구아Lengua: 그란차코 토착민족 중 파라과이에 사는 부류.

[14]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자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에 의해 생겨난, 재세례파(再洗禮派) 중 최대의 교파. 제세례파는 종교개혁 시기에 출발한 프로테스탄트계열 종파이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 퍼져 있으나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되어 있다

[15] 카야포족Kayapo: 아마존 남부 지류 토착민족.

[16] 헤센hessian(burlap): 자루를 만드는 데 쓰는 튼튼한 갈색 천.

[17] 하이메 샤엔스 구스만Jaime Sáenz Guzmán(29 October 1921.10.29-1986.08.16. 볼리비아): 볼리비아의 시인, 소설가, 단편 작가다. 라파스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으며 안데스의 거친 지형과 혹독한 기후는 그의 작업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장르를 구분하기엔 어려운 독자적인 색채를  띠는데 초현실주의 문학과 유사한 면모가 있다. 오랜 시간 알콜 중독과 싸웠고 그의 시에도 나타난다. 항간엔 저주받은 시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오픈된 양성애자이기도 했다.

[18]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1915.11.25-2006.12.10. 칠레): 칠레의 군인·정치가. 육군·해군·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신헌법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저항하다 대통령 집권연장찬반투표에서 패했다.

[19] 아필라arpillera: 1970년-1980년대 필레의 군부독재 피노셰 정권 시절에 유행했던 밝은 색상의 조각보.


2002

2013년 방글라데시 공장 붕괴의 현장.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관계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라나 플라자 Rana Plaza 죽음의 덫에 빠진 마지막 순간 속에서 서로를 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제31 여자중학교에서 14명의 학생이 화재로 숨졌다. 이 학교는 보수적인 성직자들이 관리하는 정부 기관 ‘여학생 교육 총회장 the General Presidency for Girls’ Education’에 의해 운영되던 곳이었다. 남녀의 완전한 분리를 위해 매우 폐쇄적이었던(폐쇄적인 구조였던) 이 학교는 과밀 위험 경고와 소화기, 화재경보기의 부족하다는 경고를 무시해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망은 ‘선행을 권장하고 악행을 방지하는 위원회the Committee for the Propagation of Virtue and the Prevention of Vice’[1] 소속 종교경찰들의 행동으로 발생한 것이 확실하다. 이들은 여학생들이 두건과 검은 예복(아바야 abayas)으로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이 건물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저지했으며, 구조대원들의 구조를 방해했다. 종교경찰은 여학생들과 민간 구조대 사이에 신체적 접촉이 발생할 위험이 있고, 이는 결국 성적 유혹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았다. 한 목격자는 경찰 3명이 여학생들을 구타해 탈출하는 것을 막았다고 이야기했고, 또 다른 목격자는 여학생들을 도우려고 했으나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제지당했다고 진술했다. 민간 구조대 관계자는 여학생들이 정문을 통해 나올 때마다 경찰들이 강제로 다른 곳을 통해 돌아 나오게 했다고 말했다.

이는 1932년 도쿄에서 발생한 이른바 ‘시로키야 화재 사건 Shirokiya Incident’과 닮아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 비극적 사건은 기모노의 단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많은 여성이 서구식 속옷을 입게 만든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시로키야 백화점 건물에 불이 나자, 기모노 차림의 여자 직원들이 5층에 갇혔다. 기모노를 입은 상당수의 직원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노출될까 두려워했고, 이에 건물에서 뛰어내리지 않아 결국]사망했다고 신문들은 보도했다. 사건 이후 즉시, 판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속옷을 착용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메카 여학생들이 화재에서 탈출하지 못해 숨진 이 사건은, 제1세계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는 방글라데시 섬유 공장들에서 발생한 화재 사망 사건의 역사와 끔찍히 닮아 있다. 불과 1년 전인 2001년 8월, 미코Mico 공장에서도 24명의 여성 근로자가 숨지고 백여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7층에서 발생한 화재를 피하고자 탈출을 시도했으나, 출구가 잠겨 있어 출구 쪽 계단에 갇힌 채 발견되었다. 이는 시브푸르Shibpur에 있는 차우두리 니트웨어the Chowdhury Knitwear 공장에서 대부분 10대 소녀였던 54명의 근로자가 화재로 사망한 사건에 이어 발생한 일이다.  이들은 야근을 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대피하려 했으나 외부에서 비상구와 출구를 잠가 두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강제로 시행된 추가 업무 시 폐쇄된 출구와 과부하 된 전기회로가 원인이 된 화재에 대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반복되어 왔다.

2013년 방글라데시 공장 붕괴의 현장.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관계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라나 플라자 Rana Plaza 죽음의 덫에 빠진 마지막 순간 속에서 서로를 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인명 손실보다 직물 도난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잠겨진 문과 창문 창살은 2013년 카라치Karachi에 위치한 알리 엔터프라이즈Ali Enterprises에서 발생한 끔찍한 화재에서 293명의 사망자와 심각한 상태life-restricting의 부상자를 만들어내는 것에도 일조했다. 현재, 화재의 원인이 업주들의 보호금 지급 실패 the failure of the owners to pay protection money라 주장하지만, 사망 원인이 된 것은 탈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건 발생 불과 한 달 전, 공장이 서구에서 승인한 안전확인서Western-approved safety certificates를 발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일이었다.

[1] 전통 무슬림 행동 규범 감독을 담당하는 가자 지구The Gaza Strip의 한 단체


7 Aprons, 13 Photographs | 7개의 앞치마, 13장의 사진

20세기 말, 시장의 여성들이 착용한 면과 합성 섬유; 2008년 라파스 길거리 시장에서 수집. 크레타 섬의 풍요의 여신들과 아시리아 사제들은 신성한 앞치마를 입었고,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보석이 박힌 앞치마를 입어 그들의 지위를 보여주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상인과 장인들이 옷을 보호하기 위해 앞치마를 입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에이프런 맨’으로 불렸다. 에이프런 맨이 매우 흔해지자 몇몇 무역업자들은 그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스타일을 자랑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행동력에 관한 한, 안데스 사회는 여전히 패권적 유럽인들과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학이 만들어낸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1930년부터 1960년까지 쿠스코Cuzco[1]의 시장 여성에 대한 마리솔 드 라 카데나Marisol de la Cadena[2]의 연구는 원주민과 메스티자의 분류가 원시인에서 문명인으로 발전하는 과정과 유사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상황을 다르게 설명한다. 오히려 이 연구에서 원주민에 대한 관점은 끝없는 관계 분류를 통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다. 그녀는 인종적 범주가 인종 차별적 분류에 기초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특정한 상호작용에 의해 협상되는지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메스티자스mestizas는 원주민 여성과 달리 하인이 아니라 도시에 살면서 상인으로서 훌륭하게 생계를 꾸린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원단의 질, 블라우스 모양, 숄을 착용하는 방식, 모자 소재 등을 바탕으로 메스티자와 그들의 고객들은 원주민과 부엔 메스티자buen mestiza(좋은 메스티자)를 각각 최하와 최고 위치에 두는 분류 체계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그러면 여성은 원주민, 메스티자 심플(단순 메스티자), 카시 다마스casi damas(거의 숙녀), 다마스damas(숙녀) 및 부에나스 메스티자스buenas mestizas(좋은 메스티자스)로 인식된다.  일반적으로 계급을 나타내는 옷은 민족 의상과는 별개로, 각기 다른 경제 상황을 가리키는 권력 구조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계급은 계속해서 변화할 수 있는 상황에 따른 상호작용에 대한 해석 역시 허용한다. 예를 들어, 옷을 갈아 입음으로써 원주민은 다마dama가 되거나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옷을 입는 방법을 배우는 오랜 과정에 선행하는 사회적 변혁을 표현한다. 식민지 지배자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여성의 망토인 악수aksu는 계속해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더욱 외진 지역 사회에서는 스페인이 그들의 정책을 시행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특히 볼리비아에서는 원주민 여성들이 스페인 스타일의 옷보다 악수aksu를 계속 입었다. 풀 스커트 위에 앞치마로 입는 오늘날의 시장 여성의 앞치마는 변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1] 쿠스코는 페루 남동부 쿠스코 주에 있는 도시이다. 80 km 북서쪽으로 마추 픽추가 있으며, 안데스 산맥 사이의 해발 3600m에 있다. 현재 인구는 약 30만명이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하고 타완틴수유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2] 마리솔 데 라 카데나 Marisol de la Cadena: 페루 리마 출신. 인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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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의 풍요의 여신들과 아시리아 사제들은 신성한 앞치마를 입었고,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보석이 박힌 앞치마를 입어 그들의 지위를 보여주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상인과 장인들이 옷을 보호하기 위해 앞치마를 입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에이프런 맨’으로 불렸다. 에이프런 맨이 매우 흔해지자 몇몇 무역업자들은 그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스타일을 자랑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행동력에 관한 한, 안데스 사회는 여전히 패권적 유럽인들과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학이 만들어낸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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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elebrated Navajo weavers had trouble getting red yarn, despite their success with other dyes, especially black and yellow. They solved this by unravelling the red thread from commercial wool flannel used for Spanish army blankets, and then re-used it in their own weavings.

나바호족Navajo의 축복받은 방직공들은 멕시코의 스페인 군사들의 담요에서 실을 뽑듯 상업용 플란넬flannel 천인 바예타bayeta[1]천에서 붉은 실을 풀어내 다른 색실과 엮어 다시 짜고 방적기를 돌렸다.

[1] 바예타bayeta: 올이 촘촘하지 않고 느슨한 양모. 걸레를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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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teen Mecca schoolgirls trying to escape a fire at their school were forced back by members of the religious police because they were ‘not properly covered’, and were all killed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14명의 여학생들은 화재가 발생한 학교에서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몸을 제대로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경찰에 의해 학교에 억류되었고, 그들 모두는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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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ose strange animals – by now, I have unwrapped all and spread them out around me (a room full of aprons!) – from those strange animals, from those feathered birds emanates a story. (More likely, I am projecting onto the poor things, yet, clearly, a bond has been formed between us.) It is wrong to call them aprons, they answer to another name, old-fashioned, but much more apposite: “pinafore”.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 지금쯤이면, 나는 모든 포장을 풀고 앞치마들을 내 주위에 펼쳐 놓았다(방은 에이프런으로 가득 찼다!) – 그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그 흐트러진 새들로부터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나는 그 불쌍한 것들에 투영하고 있지만, 우리 사이에 분명히 유대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앞치마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구식’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훨씬 더 빈틈없는: “피나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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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Jorge Hinderer Cruz | 막스 요르게 힌더러 크루즈

역사상의 모든 이름. 큰/아름다운 눈을 가진 뼈라는 의미의 ‘차카 나이라Chaka Nayra’는 호기심으로써 리마Lima의 오래된 동네(구시가지)의 길거리 상인들의 담요에 다른 물건들과 나란히 펼쳐지는 것으로 끝나기 전에, 직조를 할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원이 불특정한 뼈로 만든 도구이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형태로 순환되어 그것은 이제 국가 성장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쯤, “내가 결국 역사의 모든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1]. 도구로써, ‘차카 나이라’는 주로 직조 빗의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목적은 기하학적인 축을 형성하여 연결된 십자형 실을 서로 팽팽하게 조여, 실에 의해 나타난 여러 방향으로 함께 밀어내 고밀도 평면으로 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차카 나이라’는 긴 천long weaves, 벨트, 밴드, 또는 세밀한 작업을 위한 아주 매우 가느다란 직조 뼈weaving bone이면서 가느다란 빗이다. 예를 들면, 값비싸고 거친 질감의 직조를 장식하거나 마무리하는 것이다.

가늘고 길쭉한 뼈(elongated bone)는 다양한 동물 모양의 판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일부는 물체 자체의 윤곽을 반영하여 추가 형상을 만들어 낸다. ‘차카 나이라’를 세로축 방향과 옆면으로 돌리면, 다른 하나의 형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거북이의 머리가 나타나는데, 라마나 악어, 또는 왜가리, 심지어 실제 같은 코끼리 머리도 있을 것이다. 이 도구에 생기를 불어넣는 야생동물들의 형상과 영혼은 동그랗고 하얗고 움푹 들어간 요소들과 눈처럼 우리를 쳐다보는 구멍들에 의해 생동감이 생기는 것이다. 몸은 하나의 조각과 길쭉한 뼈와 살구크기만한 골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손에 잘 맞으며 대략 11 센티미터의 길쭉하고 가늘게 튀어나온 손잡이 역할을 하는데, 우아하게 구부러진 목(혹은 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총 16센티미터 길이다. 이것은 양이나 라마의 움푹 들어간 뼈로 만들 수도 있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내어 광택을 낼 수도 있다. 또는, 약 두 살 정도 된 아이의 허벅지 뼈로 만들 수도 있다. 뼈의 물질은 콘도르(남미 대형 독수리)의 뼈로 보기엔 너무 무거워 보이고, 성인 가톨릭 성직자의 척골 뼈로 보기엔 너무 크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다른 직조 뼈로 만들어지거나, 특정 직물에 대한 특정 작업이나 장식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은 뼈의 크기, 기원, 밀도와 더불어 빗의 이빨 수 같은 특징에 따라 나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차카 나이라가 생물학적으로 누군가의 뼈의 형태로 한때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 또는 누구의 직물 형태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차카 나이라로 다양한 옷, 생필품, 유통품, 더 자세하게는 보형물, 도구, 정신적/형식적 구조를 표현한 민족지학적인 공예품들을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결국 차카 나이라는 객관성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간단히 말해, 차카 나이라는 항상 관계를 묘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끈끈한 유대감, 많은 다른 사람들, 그 사람들의 온기, 서로의 관계, 그리고 특정한 문화적인 물건들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의 도구로써 사용되어 우리에게 다시 완벽한 옷감과 도구들로 돌아와 우리를 보호해준다.

20세기와 21세기의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차카 나이라의 변화는 콜럼버스 이전의 생산과 생계 형태와 식민지 노동과 착취의 폭력 형태 사이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반대로, 모든 조산한 라마, 어린아이의 예상치 못한 죽음,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은 모두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들의 정당한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시도로, 우리는 그들을 다시 상기시키고 구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도구를 통해 그들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우리는 차카 나이라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의 축을 한 바퀴 돌린다면, 모든 역사 속의 이름들이 살아있을 때의 눈으로부터 우리에게 말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1] 여기서 우리는 라파스La Paz의 마녀 시장Witches Market에서 우리의 작은 손가락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손가락 인형은 즉시 우리의 직조골을 입히고, 그것을 두 배로 하고, 거울을 보고, 말을 하도록 도와준다. 역사의 이름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제공받았다. 1889년 1월 5일 스위스의 유명한 문화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니체는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겸허함을 꺾는 것은, 내가 결국 역사에서의 모든 이름이라는 점이다”라고 썼다. 역사가들은 니체의 마지막 편지를 Wahnbriefe (“미친 편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손가락 인형과 관련되듯이 차카 나이라라는 단어 조합은 이름처럼 듣기 좋으나 아이마라에서는 정확한 의미가 없다. 챠카 ’chaka’는 뼈라는 뜻이고, 나이라 ’nayra’는 눈 혹은 큰 눈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이라 ‘nayra’는 눈의 확장으로, 혹은 시선이나 멀리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차카 나이라 ‘chaka nayra’는 “큰/아름다운 눈을 가진 뼈” 혹은 “멀리 바라보는 뼈”로 번역될 수도 있다.



Poncho Huayruru

독일령 식민지 토고의 한 면화 수집소.

 미국 앨라배마주의 흑인학교인 터스키기 공립 학교를 졸업한 존 W. 로빈슨 John W. Robinson 은 독일이 식민지배하고 있던 토고에 목화 재배학교 및 실험 농장을 개설한다. 터스키기는 부커 T. 워싱턴 세력이 탄탄한 지지를 받는 지역으로, 그는 노예로 태어나 19-20세기 전환기의 미국 흑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895년 애틀랜타 연설에서 그는 인종차별적 짐 크로 법 Jim Crow laws을 감내하면서도 흑인의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또한 목화에 기반한 ‘새로운 남부 New South’의 미덕을 선언했는데, 이는 노예제를 대체한 소작제도 아래에 고도로 훈련된 노동력들 곧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채집 기술에 의존한 것이었다.

한편 아프리카 토고 남부에서는 이미 에우족Ewe이 자생적으로 목화를 재배하고 있었고 지역 시장에는 “매우 내구성이 강한 면직물”이 있었지만, 수출 사업으로 하기에는 섬유 가격이 너무 높았다. 오직 여성만이 목화를 재배하고, 솜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로 뽑아, 그 방적실을 남성인 직조공에게 팔았다. 일부일처제가 아닌 관계에서 이는 여성에게 독립적인 수입이 있음을 의미했다. 독일 식민주의자의 눈에는 여성 중심의 가정에 너무 큰 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정책협회Verein für Sozialpolitik 연구소의 인종주의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던 식민주의자들은 매우 초기부터 목화 농업의 이러한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했다. 다른 유럽인들이 그랬듯이 그들도 “대미(對美) 면화 문화투쟁 Kulturkampf”을 외치며 미국의 면섬유 독점을 와해시키고 싶어했다. 이는 중대 사업이었다. 1900년까지 독일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면화 생산국으로서 업계에 40만 명이 종사했지만, 원면(原綿) 가격의 빠른 상승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칼 헬페리치 Karl Helfferich 는 “유럽 면화 산업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식민지에서의 생산뿐 이라고 주장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시도한 대농장제는 결과적으로 임금 노동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과 그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발생시켰다. 토고에서는 [대농장제] 대신 명목상으로는 자유농부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세계 시장에 내놓을 면화를 생산하지만 만약 농부들이 생산하지 않을 시에는 생산을 강요하는 폭스쿨투어 Volkskultur[1]를 만들고자 했다. 경작 및 노동 규율에 있어서의 현대적인 방법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면화 생산에 기여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경작으로의 전환과 이에 필요한 육체적 힘은 여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식민-가부장적 꿈인 부르주아 가정상을 사회 규범화 하기 위한 초석을 놓을 것이었다. 

부커 T. 워싱턴이 “당신들은 우리가 남부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목화만 기르도록 가르친 그 실수 말이다.” 라고 경고했음에도, 독일 사회정책협회 멤버들은 터스키기 및 부커 T.워싱턴 주변 그룹과 맺은 연계를 통해서, 그 방면 전문가인 미국의 ‘니그로 Negro’가 토고 남부인들이 세계 면화 시장의 생산업자가 되기 위한 완벽한 롤 모델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독일인들은 터스키기 학교 졸업생들이 식민지 당국을 존중하며 씨앗과 전문지식을 가져와서 농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01년 네 명의 졸업생이 도착했고 여성들이 사용했던 괭이를 대신할 쟁기 역시 가져왔다. 사람들은 쟁기를 보고 열광했으나 쟁기를 끌게 한 여러 동물들이 모두 체체파리 때문에 죽었다. 그리하여 ‘전문가들’ 중 한 명인 캘로웨이 Calloway는 남자들이 동물 역할을 맡아 쟁기를 직접 끌게 했으며 이는 하나의 표본, 즉 식민적 진보의 잔인한 아이러니가 되었다. 면화의 수출이 증가하고 여성의 힘은 약해졌으나, 1904년이 되자 식민지 권력은 모범적인 ‘니그로 Negro’ 농부들의 방식을 버렸고 그 대신 앞서 말한 네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존 로빈슨 John Robinson이 노스테 Nosté에 토고 면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합리적 목화 농사를 가르치는 3년 과정이었으며 식민지의 모든 구역에서 학생들을 보내야 했다. 학생들은 ‘자유’ 농부가 되기 위해 그곳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터스키기 학교와 달리 식민 당국은 그들이 학업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다양한 비공식적인 저항 전략을 사용했는데, 식민지 개척자들에게는 타고난 ‘나태함’ 탓으로 치부당했고, 자국민들 사이에서는 위신을 잃었다. 이들이 위신을 잃는 것은 가부장적 가정 모델을 만들어 내고자 한 식민지적 목표를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독일의 감독을 받는 모범 농장 생활에 배우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외롭고 불쌍한 젊은이들”을 적잖게 배출했다. 초기부터 가격보증제, 터스키기 농가에 의해 개발된 전문종자, 철도 건설 등을 활용하여, 1909년까지 면화 수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다가 이후 차츰 감소했다. 로빈슨은 워싱턴이 처음부터 공언했던 방침에 의거하여, 목화는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 것이지만 “사람들이 오로지 목화만을 쫒아 살 수는 없다 … 그들은 목화와 얌을 더 잘 기르도록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식민지배 체제에서 열외의 처지에 놓였다. 사실 토고의 농부들은 언급될 필요조차 없다. 철도, 시장, (너무나 낮았던) 가격 보증은 재배자들이 자급자족 농사를 포기하고 단일재배 생산을 하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단일재배 생산은 더 노동 집약적이면서도 추가 보상은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의 영국 경우와 달리 독일 식민주의자들은 과세와 신용 거래의 착취적 시스템을 통해서 강제력을 제도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 시장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Feather | 깃털

머리부터 윗부리 끝까지 능선을 따라 아름다운 노란 줄무늬가 이어져 있다. 같은 너비의 더 진한 노란색 줄무늬는 얼굴에서 부리 끝까지 직각으로 떨어진다. 이어 그 절반 넓이의 검은 줄무늬는 능선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며 가장자리를 따라가다 부리 끝으로부터 반 인치 안쪽으로 좁아진다. 나머지 부분은 밝은 빨간색이다. 아랫부리에는 노란 선이 없으며 윗부리와 같은 모양으로 검은색과 빨간색이 펼쳐져 있다. 차이라면 끝에서부터 1인치 정도의 위치에 검은색이 있다는 것이다. 윗부리의 짙은 노란색 줄무늬와 맞닿는 줄무늬 부분은 하늘색이다. 이 부리가 가진 모든 찬란한 색깔들이 새의 몸체 깃털과 눈 주변 피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파란색을 제외한 모든 색상은 본래 갖고 태어났다. 파랗게 나타나는 부분은 실제로는 투명한 하얀색이며 그 내부의 파란색 엷은 피부 조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 뛰어난 부리는 죽음과 함께 색이 바래지고 삼사일 내로 고유의 색을 잃는다.

스페인 수도승은 잉카문명인들이 정글 위로 “새와 같이” 날 수 있다고 보고했으며, 스페인 종교계 권위자들은 날개로 짠 직물들의 샤머니즘적 능력을 크게 두려워하고 그들을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스페인인들은 쿠스코Cuzco인근의 잉카 군부대에서 10만 마리가 넘는 양의 말린 새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날개는 제복에 사용되기 위해 보관되어 있었으며 군사들은 그 날개로 봉급을 지급받았다.

깃털 예술 작품은 남미의 많은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식민지 이전pre-Columbian 페루와 현재의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보존되었다. 마야 초기부터 불운의 아즈텍 문명에까지 이르러, 귀족과 사제, 장군들은 그야말로 깃털들을 숭배했고 이들로 망토나 머리장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완장을 즐겨 꾸몄다. 목테쭈마Moctezuma황제는 이국적인 종種으로 이루어진 자기만의 사육장을 소유했는데 새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300명의 하인이 필요할 만큼 규모가 컸으며, 목테쭈마만을 위한 깃털 예술가 단체도 후원하고 유지했다. 식민지 이전의 셀 수 없이 많은 깃털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여덟 개뿐이며,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목테쭈마의 머리장식물로 알려진 작품이다. 길이 166cm에 넓이 177cm로 상당히 거대하며, 케트살Quetzal[1]의 녹색-금색 꼬리 깃털 장식 500개로 구성되었고, 흰색, 파란색과 붉은색 깃털 밴드와 작은 금색 로제트로 장식됐다.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éz[2]가 스페인 침략 중에 목테쭈마를 시해한 뒤 그의 왕관 (뻬나초 Penacho)은 스페인인이 압수했다. 왕관은 18세기에 티롤Tyrol에 위치한 암브라스 성Ambras Castle의 창고 상자에서 다시 발견됐고 비엔나 민족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성의 저장고에 있었던 1566년부터, 식민지 이전 남미였던 이 머리 장식의 기원은 잊혔고 “무어인의Moor-ish[3]모자”라 불렸다.

  1986년부터는 아즈텍 국가의 후손들과 멕시코 정부에서, 비록 이 장식이 목테쭈마의 소유였다거나 모든 날개들이 진품이라고 인증 받진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정부에 반환을 요청했다. 반환 요청의 진행 과정에서 비엔나 자연사 박물관 전 관장 올리버 파겟Oliver Paget은 오스트리아가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합법적인” 방식으로 대부분의 소장품을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위 장식의 복제품은 멕시코 혁명기의 국가상징으로 제작되었으며, 목테쭈마의 거처 유적 위에 건립된 멕시코시티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2011년부터는 이 왕관을 비엔나 인류학 박물관에서 일시적으로 대여해 오는 걸 고려 중에 있다. 아직 운송 문제, 의사소통 문제, 정치 법률적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협상은 현재 진행중이다. 파라과이의 아요레오Ayoreode[4]족장들이 패배하고 선교 사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피와 깃털들을 남기고 떠났다. 그들의 입을 권리와 자부심을 잃은 채.

[1] 케트살Quetzal: 중미 산의 꼬리가 긴 고운 새; 과테말라의 국조

[2]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éz: 1521년 오늘날의 멕시코인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였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첫 개척자 세대에 속한다.

[3] 무어족Moor; Moorish: 아프리카 북서부에 살았던 이슬람 종족. 8세기에 스페인을 점령했다.

[4] 아요레오족Ayoreode; Ayoreo: 파라과이 서부 아마존 강 유역의 토착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