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Road show: South Korea

2011년 처음 진행된 <로드쇼>는 서로를 모르는 국내/외 작가가  함께 여행을 하며, 행선지에 대한 서사와 정치적인 영향, 문화적인 기대치에 대해 서로 알아가고 공동체와 교류를 시도하는 프로젝트이다.  2011년은 도시화와 환경이라는 넓은 범위의 주제에 관해 협업을 시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기획: 
최태윤, 신보슬

기획지원:
토탈미술관, 아이빔아트 앤 테크놀러지 센터, 리슨투더시티

진행:
노순택, 신윤선, 유경아, 이여운, 홍승호

참여작가: 
구지윤, 김선형, 김승범, 노바 쟝, 노순택, 매리 메팅리, 박은선, 소원영, 신윤선, 연미, 이솔, 존 코어스, 최태윤, 프란 일리히, 옥인 콜렉티브 

ISBN:
9788-89-9617-899-6

판매가:

15,000원

*『로드쇼 : 대한민국』 보러가기

목차:
로드쇼를 시작하며 
로드쇼 일정
로드쇼 다이어리
참여작가
     옥인 콜렉티브 
     박은선
     이여운
     연미
     김선형
     노바 쟝
     김승범
     구지윤
     소원영
     매리 메팅리
     존 코어스 
     프란 일리히
     이솔
     신윤선
     최태윤
     신보슬

Digital Playground 2007

2007.10.16(화)-11.6(화)

참여작가&작품: 
에도 스턴Eddo Stern(미국)_<Dark Game>
이니치오 베스티아리오Inicio Bestiario(스페인) _<Mitozoo>
파스칼 글리스만 & 마티나 횔플린Pascal Glissmann & Martina Hoefflin (독일)         _<elf: electronic life form>
재커리 리버만Zachary Lieberman(독일) _<Drawn>
김정한KIM Jung-han (한국)_<Sensory Synchronism: Eyes and Ears>
서효정SUH Hyo-jung (한국)_<bird cage>
양아치Yangachi(한국)_<Kill Bill>
유민호YOO Min-ho(한국)_new piece
이배경LEE Bae-Kyung (한국)_ <City, Man, Wind>
전병삼JEON Byeong-sam(한국)_<Drop Drop>
최태윤CHOI Taeyoon(한국)_<Calling 1995>

큐레이터:
신보슬, 요한 노박

후원:
복권기금

 

Artists: 
Eddo Stern, Inicio Bestiario, Pascal Glissmann & Martina Hoefflin, Zachary Lieberman, KIM Jung-han, SUH Hyo-jung, Yangachi, YOO Min-ho, LEE Bae-Kyung, JEON Byeong-sam, CHOI Taeyoon

Curator:
Shin boseul

Support:
THE KOREA LOTTERY COMMISSION

Subtle Whispering (미묘한 속삭임)

2007. 10. 9(화) – 11. 6(일)

참여작가: 
시티온파이어 (City on Fire)_이바 콕 (Eva Koch)_야콥 태커 (Jacob T kker)_쉬네트일러스 (JeannetteEhlers)_요한나 돔커 (Johanna Domke)_몰튼 뒤스고 (Morten Dysgaard)_난나 데보아불 (Nanna DeboisBuhl)_니콜라이 레케 (Nicolaj Recke)_넷필름메이커스 (Netfilmmakers)

큐레이터:
신보슬

후원:
주한 덴마트 대사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tists: 
City on Fire, Eva Koch, Jacob T kker, JeannetteEhlers, Johanna Domke, Morten Dysgaard, Nanna DeboisBuhl, Nicolaj Recke, Netfilmmakers

Curator:
Shin boseul

Support:
Royal Danish Embassy in Korea
Arts Council Korea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 (Springwave Festival)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 (Springwave Festival ; 국제다원예술축제)

기    간:
2007년 5월 4일 – 5월 30일

장    소 :
예술의 전당,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LIG 아트홀, 로댕갤러리, 토탈미술관

주    최:
Springwave Festival 조직위원회

후    원:
문화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프랑스대사관, Cultures France,이탈리아대사관, 루프트한자

협력기관:
이태리문화원, 프랑스문화원, 독일문화원,

협    찬:
(주)마리꼬

크리스티앙 리쪼 (Christian Rizzo)


작품명:
100% 폴리에스테르 (100% Polyester)

락(Rock)가수, 현대미술가, 패션디자이너, 작곡가 이자 안무가인 크리스티앙 리죠. 누가 그의 상상력을 막을 수 있을까.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그는 움직이는 모형을 통한 건축적 공간, 오브제와 의상을 통한 변장술, 모방과 변형을 통한 체면적 연출 등을 시도한다.

“100 퍼센트 폴리에스터”에서 육체는 부재한다. 차가운 공기의 움직임을 따라 퍼지는 전자음, 허공을 바라보고 돌아가는 선풍기들, 천장에 매달린 긴 줄, 그 끝에 매달려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기형적인 두벌의 의상,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 사이의 우아하고 섬세한 최면적 명상의 공간. 12분 동안 계속되는 이 공기와 오브제의 춤은 환상적인 듀오(Duo)가 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인 상상력을 유도하기도 하고, 부재(Absence)에 대한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할 것이다.

무용을 시작하기 전 크리스티앙 리죠는 락 그룹을 결성하여 툴루즈(Toulouse)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였고, 니스의 빌라 아르손(villa arson)에서 시각 미술을 전공하였다. 이후, 현대 안무가들(Jean-Michel Ribes, William Petit, Mathilde Monnier…)을 만나 사운드 디자인, 무대 디자인, 의상 디자인, 안무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협업하였으며, 현재 <association fragile>을 창단하여 활동하고 있다.


티노 세갈(Tino Sehgal)

작품명: “Instead of allowing some thing to rise up to your face dancing bruce and dan and other things, 2000.”

2007년 5월 토탈미술관 (11시- 18시), 매 3시간마다 어느 누군가에 의해 숫자의 전환이 반복되면서 티노 세갈의 작업 “Instead of allowing some thing to rise up to your face dancing bruce and dan and other things”이 완성된다. 이 작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세갈의 퍼포먼스는 댄 그라함(Dan Graham)과 브뤼스 노먼(Bruce Nauman)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움직임의 켑쳐들을 기본으로 한다. 만약 댄 그라함(Roll, 1970)이 브뤼스 노만의 작업(Wall-Floor Positions, 1968)에서 카메라의 비가시성을 비판한다면, 세갈은 이 비판을 다시 비판한다.

현대미술의 총아로 떠오르는 런던작가 티노 세갈, 현대무용과 정치경제학에 조예 깊은 그는 어떠한 유형의 사물을 제작하지도 않으며, 물질적인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는 한 순간의 동작, 퍼포머들에 의해 발화된 단어들, 그리고 이들간의 상화작용들, 이러한 한시적인 작업은 전통적으로 “예술”의 시스템을 정의하는 동격의 것들, 즉, 생각, 시각화, 독창성, 생산자, 관객, 소유자, 그리고 시장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Tino Segal은 1976년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한다. 최근, 낭트미술관(2004), 얀호벤의 바나베미술관(2004), 런던 현대미술미술관(2005), 브레겐 미술관(2006)에서 개인전이 있었다. 또한 베니스 비엔날레(2003), 마니페스타4(2002)에 참가한바 있다.


나디아 로로(Nadia Lauro)


작품명: <I hear voices>

현대무용, 퍼포먼스, 조경, 패션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프랑스 무대설치예술가,  나디아 로로는 2007년 5월, 평창동에 위치한 토탈미술관에 유기적인 사색의 공간을 만든다. 짙은 회색 야생동물 가죽으로 뒤덮힌 바위들,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음들, 그리고 프랑스 안무가 라티파 라비씨(Latifa Laabissi)와 함께 기이한 동작의 한국의 퍼포머들이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나디아 로로는 다른 예술가들과의 협업과정을 통해, 다양한 상상의 컨텍스트를 설정하여 무대장치, 시각 인스톨레이션, 혹은 의상을 제작하기도 한다. 나디아 로로의 무대설치는 팝(pop)적이면서도 미니멀하고 자극적이면서도 모험적인 공간이다. 관객들에게 무대는 더 이상 물질적인 조작을 위한 인위적 공간이 아니다.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시선, 즉 관객의 시선과 무대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육체와 소리를 포착하는 넘실거리는 파도의 물결의 장으로 빨려 들어간다.

작가는 1970년에 태어나 현재 파리에서 거주한다. 베라 만떼로(Vera Mantero), 브누와 라샹브르(Benoir Lachambre), 제니퍼 레이시(Jennifer Lacey)와 같은 현대무용 안무가들과 함께 작업하였으며, 조경 건축가인 로렌스 크레멜(Laurence Crémel)과 자연경관 속의 인스톨레이션과 도시형 가구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카타하리(kattahari)에서 크리스챤 디올의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패션쇼를 위한 무대를 디자인하였다. 프랑스의 성(chateaux of France)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20개의 다른 공간에 20개의 영상물을 제작하는 환경-비디오를 협업하였고, 이 작업은 2001년 리옹 비엔나레, 2003년 키엘 미술관에 소개 되었다

당신은 나의 태양 : 동시대 한국미술을 위한 성찰적 노트

1960년대부터 45년간 빛을 발한 예술을 ‘기념’하기위해 2004년 10월 15일 부터 12월 5일까지 토탈미술관에서 진행되었던 《당신은 나의 태양: 동시대 한국미술을 위한 성찰적 노트》展의 도록이다.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도약하며 시간 이미지를 산출해내는 방식의 편집으로 제작되었다. 

참여작가:

곽인식, 권진규, 김구림, 김경인, 김용익, 김관수, 김보중, 김봉준, 김천일, 김장섭, 김주호, 김범, 김소라, 김두진, 남관, 민정기, 문범, 박불똥, 박이소, 성능경, 신학철, 안창홍, 안규철, 오윤, 오인환, 육근병, 윤석남, 유승호, 이강소, 이승하, 이태호, 이응노, 이승택, 이건용, 이중근, 장지아, 장진영, 정복수, 조성묵, 주재환, 최병민, 최정화, 홍승혜, 홍명섭, 홍성담, 홍선웅, 홍순모, 그룹 오아시스프로젝트 

인터뷰:
김병기, 김윤수, 전성우, 김구림, 이승택, 윤명로, 이건용, 신학철, 김봉준, 홍성담, 김천일, 육근병, 김홍희, 최정화, 이정우, 김두진 

자료제공:
김미경, 김용익, 최열, 정준모, 미카 하루카와(Mika Harukawa)

정 가:
비매품

*『당신은 나의 태양 : 동시대 한국미술을 위한 성찰적 노트』보러가기

목  차:
전시공간도면 
감사의 말 
서   문
기획자 인터뷰
안규철 / 박이소
1층 전시장면
최정화 / 김    범 / 김소라 /  유승호 / 김두진 / 김천일 / 이승하 / 오인화 / 홍승혜 / 윤석남
김홍희 인터뷰 
태평양을 건너서 전시리뷰
육근병 / 장지아 / 이중근
그룹 오아시스프로젝트
도시와영상/의식주
광주비엔날레 창립선언문
이정우 인터뷰 
홍명섭 / 문   범 / 정복수 / 김보중
중간방 전시장면
김봉준 / 홍성담 / 오   윤
김윤수 인터뷰
‘일제 식민잔재 청산’의 길 
민정기 / 최병민 / 안창홍
‘현실과 발언’
신학철
민중미술 탄압
장진영 / 박불똥 
민중미술 15년의 발자취
홍선웅
민중미술 15년의 약사
79~89년 소집단 활동상황
미국의 민중미술전
김주호 / 홍순모 / 이태호 / 성능경 / 김구림
제4선언
최근의 전위미술과 우리들 
김지하의 오적
이승택 / 이건용 / 이강소 / 김경인
현실동인 선언문에 대하여
김용익
지하 전시장면
김관수 / 김장섭
지하 전시장면
전성우 인터뷰
곽인식 / 권진규
권진규에 대해 다시 생각함
윤명로 인터뷰
민족기록화전 현장답사 명단
민족기록화 제작 명단
조성묵 / 남   관 
김병기 인터뷰
이응노
제4집단
한국 단색조 회화에 대한 소고 
한국현대미술 연표

John Barker | 존 바커

판초. 당신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시간의 세계는 짜임새 밖에 있네요, 오늘밤 나를 위로해주세요. 오 토마스, 토마스 카타리Tomás Catari[1] 당신은 저들(스페인 세력 혹은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 중재자들)이 해야 한다는 대로 다 했어요. 저들의 언어로 글도 쓸 수 있었고 저들의 왕도 들을 수 있도록 말했죠.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2]의 사람들은 귀를 먹은 건지 아니면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백인과 메스티조mestizos[3] 무리는 여기 차얀타Chayanta에서 우릴 모욕하고 약탈하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약탈당했는지 당신은 진실을 말했죠. 그러자 저들은 당신을 죽였어요. 꼭 오늘처럼 태양이 높이 떠있던 날 당신을 죽였죠. 오늘 밤만큼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스하게 감싸주세요. 우리의 성인이 베푼 기적처럼 잠이 온다면 자고 일어나 다시 싸울 준비가 되어있을 겁니다. 미카엘라Micaela와 다른 형제들도 함께 모여 싸울 거에요. 당신의 붉고 푸른 짜임새는 나를 점점 잠들게 하네요. 미카엘라가 천을 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 우리는 첫 아이로 배가 많이 불러 있었고 함께 있어 행복했습니다. 사제가 우리가 죄를 지었다며 혼인하라 명령하기 전 까지는 말이죠. 죄요? 우리에겐 아닙니다. 혼인도 하기 전에 밤에는 침대에서 낮에는 함께 일하며 하루하루 서로를 알아 나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될 만큼 그들에겐 혼인이 큰 일이었던가요? 미카엘라의 아버지 마테오 초케Mateo Choque는 사제의 말이 옳지 않다고 반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삶의 방식이 있고 혼인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 죄로 벌을 받았습니다. 거리로 끌려 다니면서 자신이 멍청한 인디언이며 사제에게 반박한 죄로 처벌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자백해야 했습니다.[4] 나는 마테오의 수난을 듣고 목격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분노가 나의 마음에 지펴졌고, 살인에 대해선 아는 게 없던 나는 저들이 토마스를 죽였듯 살인을 했고 그날 이래로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우리 형제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밤은 내 몸을 촘촘히 감싸며 나를 잠들게 하네요.
토마스의 마음에도 분노가 있었죠. 블라스 베르날 Blas Bernal이 우리를 온갖 방법으로 약탈했고 그 약탈로 자신의 친구이자 스페인 사람이 알로스Alos의 도움을 받아 추장이 됐으며 알로스는 우리를 지배하는 것으로 돈을 벌었습니다.[5] 직함에 걸맞지 않은 그 족장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고 제 이름을 착취하는 데 썼습니다. 팔 수도 없는 쓰레기같은 것들도 우리에게 팔아내라고 어찌나 강요하던지. 아마 저 부자들은 1 페소라도 벌 수 있다면 사람도 죽일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가 글을 썼죠. 저들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었고, 우리도 우리 의무를 알고 있지만 착취나 학대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상황이 얼마나 온당하지 않은 지 설명했습니다. 우리 작물과 가축들에 세금이 부과 되어선 안된다고도 설명하며 편지를 썼고 이 때문에 마테오 초케처럼 벌을 받게 됐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울려 퍼진 말들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토마스를 해도 달도 오후의 빛도 없는 감옥에 가뒀으며 토마스의 마음엔 더 큰 분노가 깃들었죠. 그럼에도 맞서 싸우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누가 이기게 되든 결국 우리에겐 지는 싸움이라고. 하지만 아닙니다, 다시 글을 쓰게 될 거예요.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그가 맞았다고, 토마스가 옳다는 걸 알고 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죠.
이젠 너무 늦었으니 모든 것이 전과 같을 순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린 저들이 부르듯 멍청한 인디언들이 아니고 무엇도 확실치 않단 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곡물을 심습니다. 언제가 적기인지 판단하는 법을 조상들로부터 알게 되었죠. 곡물이 잘 영글거란 확신은 없어도 제때에 옳은 방식으로 씨를 뿌렸습니다.
토마스가 다시 수감됐을 때 우리가 “아니오, 그는 좋은 사람이며 진실을 말했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해야 했던 것도 잘한 일이었습니다. 늦지 않은 때에 포코아타Pocoata 마을로 가서 토마스를 데리고 함께 차얀타로 돌아와 우리의 삶을 영위하려 했고 이는 제때 일어난 옳은 행동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려면 돈이 필요해서 우리의 주인이자 귀족이 된 알로스가 우리를 잡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죠. 그러나 이미 저질러졌고 한번도 피를 묻혀본 적 없던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군인을 죽였습니다. 다시 보니 알로스도 별거 아닌 한 사내일 뿐이더군요. 우린 그를 체포하고 말했어요. 토마스가 너보다 훨씬 고매한 인간이란 걸 생각하면 적합한 협상은 아니지만 네가 토마스를 잡아 놓는 동안 우리는 너를 억류할 거라고. 그래요, 결국 우린 토마스를 데리고 함께 돌아왔습니다. 토마스는 이제 우리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살았 듯이.

당신의 온기를 내게 감싸주세요, 오늘 내가 끝없이 달렸 듯 멈추지 않을 내 마음에 기적을 일으켜주세요, 내일 일어나 토마스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지금 잠들게 해주세요, 온 세계가 제 것인 양 우리의 돈과 광산을 강탈해간 백인들과 그들의 메스티조 무리들을 믿지 않고 그들의 과오를 알아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토마스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당신의 다마소Dámaso와 니콜라스Nicolás 형제[6]들을 찾을 것이며, 그들도 미카엘라도 준비가 됐으니 우리는 라플라타La Plata[7]로 함께 가서 다 죽일 겁니다. 살인은 해본 적도 해볼 생각도 없었던 우리가.
포코아타에서 돌아온 토마스는 우리도 살아야 했던 방식 대로 살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법이 우리의 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법은 힘이 없을뿐더러 우릴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토마스는 우리를 학대한 자들은 살인에 능숙 하므로 그들을 죽이려 들지 말라고 했죠. 그들이 만약 살인을 시작한다면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이제 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 건 오직 두려움뿐이죠. 우리가 체포할 때만 해도 알로스는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그는 공포 때문에 더 이상의 군대를 보내지 말라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당시의 나는 저들이 평생토록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고 믿고 싶진 않았습니다. 우린 두 번 다시 억압당하지 않을 거라고, 우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아무 말도 듣지 않은 듯 돌아와서 토마스를 체포하고 수감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소극적이었다 해도 우리가 분명 목소리를 냈는데 말입니다. 알로스 한 명은 공포를 느꼈지만 사실 그의 부류들인 백인이나 사제들이나 저들처럼 살려 하는 사람들은 늘 더 많았던 것이죠. 우리 작물과 가축에 세금을 부과하며 우리를 가르치려 들고 꼭 오늘처럼 1 페소를 위해 사람도 죽이죠. 우리는 다시 토마스를 데리러 갔지만 치안 판사와 그의 사람인 광산 소유주 알바로Alvaro와 그의 세력들이 그를 살해했습니다. 우리는 분노에 차서 몇몇을 죽이고 겁에 질린 다른 인간들도 죽였습니다. 그저 두려움만 이해하는 이들은 도망가버렸습니다.


이제 내 마음도 머리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거나 도망가는 것을 보기 전까진 온통 혈관이 근질거립니다. 하지만 오늘밤만은 당신이 짠 천으로 나를 감싸고 흙 속의 감자처럼 따스하게 지켜주세요. 형제들과 모여 다시 싸우러 가기 전에 잠으로 데려가 주세요. 알바로가 우리의 땅에서 수천 페소를 파낸 광산으로 숨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순간 나는 무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에 화를 안고 따라갔습니다. 아마 멍청한 인디언들은 따라오지 못할 테니 광산이 안전할 것이라고 알바로는 생각했겠죠. 난 밖에 서서 토마스가 나에게 가르쳐준 언어로, 인디언들은 도망갔으며 라플라타에서 당신을 위한 상금을 가지고 왔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알바로가 나왔습니다. 1페소를 위해서라도 살인을 할 그 사람. 나는 바위를 들어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살인같은 건 몰랐던 나는 그의 머리를 거듭 박살냈습니다.

 

이 익명 안데스 토착민이 남긴 밤의 상념은 지금은 볼리비아령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관할이었던 곳에서 1781년 토마스 카타리가 사망한 날 밤을 배경으로 한다. 족장들 혹은 추장들은 토착 민족 단체와 스페인 왕(그리고 왕의 중재자)사이의 중재를 맡고 있었다. 토마스도 그중 한 사람이어야 했으나 식민지 파벌 싸움에 압력을 받고 있었다. 대신 토마스는 현존하던 식민지 법을 이용해서 그의 공동체를 보호하고자 했다.
위 익명 토착민은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서 카타리와 그 형제들과 뜻을 함께 하였고, 현재는 수크레Sucre[8]의 자리인 라플라타 공격에 나섰으나 카타리 형제들은 배신당했으며 당시 가장 참혹했던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이 토착민의 운명은 알려진 바 없지만 아마 다른 토착민 저항세력 전사들과 함께 라파스 포위 작전에 참여했을 것이다. 라파스 포위 작전은 바르톨리나 시사 Bartolina Sisa와 그의 파트너 훌리안 아파사 Julian Apaza가 함께 주도했는데 아파사는 카타리 형제들의 영광을 기리고 페루의 투팍 아마루 Tupac Amaru 혁명[9]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을 투팍 카타리Tupac Catari라고 이름지었다. 스페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라파스를 지켰다.

[1] 토마스 카타리Tomás Catari (1740.3~1781.1.15): 안데스 고산 토착 민족 케추아의 족장이자 저항 세력의 지도자였다.

[2] 1532년 잉카 제국이 붕괴되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후 페루 부왕령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리오데 라플라타Río de La Plata 부왕령으로 편입되었고 경제와 사법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식의 경제와 사법 제도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1780년엔 페루의 투팍 아마루 2세의, 1781년엔 아이마라인 투팍 카타리의 반란이 있었다.

[3] 메스티조인Mestizo: 스페인인과 북미원주인의 피가 섞인 라틴아메리카 사람.

[4] 1778년도 문헌에 따르면, 사제 도밍고 코르테스Domingo Cortés가 마테오 초케의 딸에게 결혼을 강제하였고 마테오는 그에 반대한 죄로 위와 같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5] 토마스 카타리는 시장에게 서신을 보내, 당시 볼리비아 마차Macha 지방 추장이었던 블라스 베르날의 공물 약탈행위를 신고하였고 항소법원은 베르날을 수확 업무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나 후임 시장 호아킨 데 알로스Joachin de Alos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6] 다마소Dámaso와 니콜라스 카타리Nicolás Catari 형제는 토마스 카타리의 사촌이며, 토마스 카타리 처형 후 항쟁의 주도권을 이어받아 페루 상부 지역의 다른 공동체까지 혁명을 확장했다.

[7] 라플라타La Plata: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도.

[8] 수크레Sucre: 볼리비아의 수도

[9] 투팍아마루 Tupac Amaru 혁명: 투팍 아마루 1세는 스페인의 정복에 대항하다 페루 부왕에 의해 1571년 처형된 잉카 제국 왕족이며, 200년 후 1780년 쿠스코 출신 원주민 지도자였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투팍 아마루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투팍 아마루2세로 명명했다. 당시 원주민들은 안데스 지역 광산에서 혹사당하는 처지였다. 투팍 아마루 2세는 스페인에 대항하여 운동을 일으켰고 정복자들에게 상징적인 보복을 했으나 1년 뒤 처형당했다. ‘투팍 아마루’라는 옛 잉카제국의 영화를 꿈꾸는 오늘날 토착민들에게도 상징적인 이름으로 남아있다.

1795

인도 타밀 나두Tamil Nadu의 동해안 쿠달로르Cuddalore 지역에서 네 명의 직조공이 영국동인도회사 주재원인 데이비 베르파 체티Davie Veerpah Chetty의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 불태웠다. 일반적으로 그런 지푸라기 인형은 ‘죄 많은 삶’을 살았거나 처참하게 죽은 경우와 같은 ‘좋지 않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에 사용되었다. 체티의 인형이 불태워진 것은 [당시]‘개인화된 폭력이 핵심 역량중 하나’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선구자임을 자처하며 자본주의적 규율을 수백명의 독립 직조공들에게 부여했던 동인도회사에 대항하는 지난 30년간의 투쟁[의 과정]에서 빚어진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전에는 직조공들이 인도상인들과 거래했을 뿐 아니라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들과도 거래를 했었다. 프랑스 회사를 위해 일을 했었던 체티의 아버지는 앞으로는 영국와 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퐁디셰리[1]와 그 내륙 지역[의 땅]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결정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무굴제국Mughal Empire의 쇠퇴[2]와 해체로 인해 영국의 동인도회사(EIC)[3]는 1763년 청갈파투Chingleput[4]에서 조세권을 얻었고, 마드라스Madra[5]와 쿠달로르Cuddalore 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갔고, [이로 인해] 프랑스령은 소수 민족 거주지로 축소되었다.

그들은 체티 같은 동인도회사의 주재원들은 물론 쇠락하는 인도의 보병대와 세포이로부터 자체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자체군을 모집한 것은] 1771년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지역 직조공들이 식민지 경쟁국가들과 거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후에는 식민지 반대론자들과 싸우고, 지역의 직조공들에게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식민지 이전의 인도에는 없었던 국가 권력과 권위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 [그리고] 그들은 전례없이 직조공보다 우위에 섰다.” 초기에는 직조공에 대한 대우가 꽤 좋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14 세기 플랑드르 직조공에 대한 처우나 오늘날 노동착취 공장sweatshops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비슷하게 변해갔다. 먼저 직조공들은 그들이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원사를 구매하도록 정책을 바뀌었다. 그리고 [동인도] 회사는 독점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직조공과의 계약을 언제라도 파기할 수 있는 상황으로 뒤바뀌었다. [또한] 한 달에 두 개의 긴 천을 생산해 내라고 요구핶기 때문에, 노동의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는데, 직조공들은 이것이 ‘불가능하고 억압적’이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엄격한 자체 품질 관리를 도입했고, [게다가] 언제라도 [그들이 짠] 직물(cloth)을 반품할 수 있었던 식민지 이전과는 반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직조공이 개인 상인과 일을 하면, “동인도회사의 구마슈타Gumashta[6]가 그 직조공은 물론 그의 아들까지도 체포하여 심하게 매질을 했다. [그리고] 얼굴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한 뒤, 손은 등뒤로 묶고,세포이들이 이들을 감시한 상태에서 마을을 걸어 돌아다니게 했다.  이는 ‘누구라도 개인상인과 일을 하는 직조공은 같은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표하는 것과도 같았다.” 1770년대에는 직조공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19세기 초에 이르러 직조공의 수요가 감소한다),  1779년에 이르면, 그들의 수입이 1768년이후 35%가량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로 인해 직조공들이 단합하여 작업을 중단하거나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1775년 사카르 북부North Sarkars에서는 파업이 4개월가량 지속되었고, 3년 후 1000명의 직조공들이 쿠달로르Cuddalore에 합류했으며, 7개월 동안 회사 투자를 방해하였다. 1789년 아르니에서는 직종공들에게 관습을 어기고 약탈을 일삼는 군대가 빼앗아간 옷감에 대해 배상하라고을 요구했던 [회사의] 대리인들을 채찍으로 때리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회사 소속이 아닌 직조공에게 부과된 세금이나 요구를 피하기 위해 동인도회사가 부채 회수나 탈출을 막는 사냥꾼으로 세포이군을 고용하는 동안 직조공들의 베틀을 빼앗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전술도 자주 사용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전형적인 식민지전략에 맞게 분류하고 구분하는 카스트제도에 기반하여 직조공들을 다루었고, 그들의 불만을 엄격하게 경제적인 것으로만 보고자 했지만, 그들은 직조공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쿨리coolies[7]‘라고 분류하고 정의한 경우처럼 그들의 자부심을 공격한다고 생각한 경우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드러난 것은 … 원시주의primordialism가 암시하는 것처럼 직조공들의 (사회의 온갖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강인함이 아니라 그 가변성plasticity이다. 직조공이 만든 연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뛰어난 독창성, 풍부한 자원과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저항하는 행위 자체, 그리고 저항하기 위한 동원의 필요성은 직조공들이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창조하도록 이끌었다.”

 

[1] 인도 동부 타밀나두 주의 인접 지역에 위치한 푸두체리의 행정 중심지이다

[2]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중남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왕조이다. 무굴 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이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1857년 무굴제국은 멸망했다.

[3]  British East India Company의 약칭

[4] 인도 타밀 나두주의 도시

[5] 현 인도의 첸나이, 1996년까지 마드라스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6] Gomashta 라고도 표기. 동인도회사에 있던 인도인 에이전트를 일컬음

[7]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중국, 인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계 외국인, 이민자들을 일컫는 말로 정규적인 일자리가 없는 단순 노동자였다. 주로 대영 제국의 식민지, 옛 식민지인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페루,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하와이, 피지, 모리셔스, 레위니옹 섬, 서인도 제도,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저임금으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

Negro Cloth | 니그로 천

뒤편의 구찌 우비와 모자, 맞춤 제작한 재킷을 입고 할렘 매장에 있는 대퍼 댄Dapper Dan

“나는 많은 흑인들이 날씨 때문에 체온 저하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바람도 습기도 통하지 않는 얇은 천을 걸치고 있다.”
– 혼 T.T. 보울딘 Hon T.T. Bouldin, 노예 소유자, 미국 의회, 1835년 2월 16일.

당시 ‘플림지 천flimsy fabric’은 니그로 천 Negro Clothes이라 불렸으며, 미국의 남쪽에 있는 몇몇 소수의 방직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이 천은 거칠고 표백되지 않거나 갈색의 면직, 혹은 양모와 면의 혼방이었고 노예와 죄수복에 사용되었다.  1735년의 흑인법 Negro Act에서는 [니그로 천을] 노예들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직물 중 가장 싼 직물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주인이 주는 헌 옷을 입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는 [흑인노예가 주인 주는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당시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복장 차이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18세기, 존 울먼 John Woolman은“농장의 흑인 남자는 5야드의 흰색 또는 파란색 니그로 천으로 만든 형편없는 코트와 긴 바지를 받는다. 남자와 여자들은 벌거벗은 몸을 [겨우] 가릴 정도의 아주 작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정도였고, 열 살에서 열 두 살 정도의 소년, 소녀들은 주인의 자녀들과 함께 있을 때,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많은 농장에서 노예들은 일 년에 한 번 옷감을 배급 받았다. 대부분의 노예는 [자신이 받은] 옷감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면화를 고르는 일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직접 옷도 만들어야 했다. 만약 옷이 다 낡으면, 다음 해까지 [거의] 벌거벗은 채로 지내야 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존 랜킨 Rev. John Rankin 목사는 “모든 노예제 국가에서는 많은 노예들이 노동을 하거나 잠을 자는 동안에 그들을 따뜻하게 해 줄 의복이 부족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라고 적은 바 있다. 19세기 초 노예들을 위한 칙칙하고 값싼 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매사추세츠 주, 로웰Lowell시에 있는 미국 북부 공장[1]들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로웰이라는 말은 노예들이 거친 천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예들은 자신의] 스타일 감각은 억누를 수 없었다. 인디고 염료를 만들었던 노예들은 자신의 옷을 만들 때에도 비밀리에 인디고를 사용하였다. 1744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법정의] 대배심은 “특히 흑인 여성들은 법이 요구하는 대로 옷을 입지 않고, 상당히 화려하고, 규칙에 어긋난 옷을 입는다”며 항의했다. 이는 식민 당국이 토로하는 지속적인 불만이었다. 17세기 브라질 식민 당국은 “[식민지] 국가의 여성 노예들의 복장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게 고상하다는 점”에 대해 우려했다. 1777년 미국 아룬델 카운티에서 도망친 노예 ‘딕Dick’은 건방지게도 녹색 천으로 된 코트, 파란색 커프가 달린 붉은색의 플러시 망토, 소매에 금색 레이스가 달린 짙푸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백인들은 [그에게] 경멸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이에 배우 패니 켐블 Fanny Kemble은 노예 폐지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노예들이 “프릴, 주름 장식, 리본, 양털 같은 그들의 머리에 꽂는 빗 등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고 다니는지 모른다”고 쓰고 있다.

1940년대에 미국 남부의 젊은 흑인들black Americans 과 젊은 멕시코계 2세대 파추초들pachuchos[2] 이 [앞다투어 유행처럼] 만들기 시작한 패션은 주트 수트 Zoot Suit[3]가 되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으며, 어깨를 흔들었고, 발목에 꼭 맞는 커프스로부터 위로 부풀어 오르는 형태의 바지 속에 있는 다리를 휘젓는다. 코트는 길고 엉덩이 부분이 꽉 끼며 어깨의 폭이 너무 넓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서양식의 외투가 될 수 없어 보인다. 혹은 이 옷은 할렘의 밤 문화의 언어로는 “드레이프 형태에 진짜 주름과 미치광이의 세포처럼 어깨에 패드가 덧대어진 굉장한 코트”라 불리기도 했다.

그 스타일이 어떻게,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전이 의견이 분분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옷감 배급이 성행할 당시 주트 수트는 인종적으로 ‘불량한’ 것 이자 ‘갱’의 의복으로 정의되었다. 전시산업위원회 The War Production Board는 주트 슈트를 효과적으로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재단사들은 불법적으로 수트를 계속 만들었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주트 수트족들은 경찰과 백인 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백인들은 1943년 로스앤젤레스와 디트로이트에서 인종 폭동을 일으켰다.[4] 주트 수트는 용인되기에는 너무 쿨하고 너무나도 공공연하게 반항적인 행동이었다. 1980년대 뉴욕 할렘에서 시작된 대퍼 댄Dapper Dan(다니엘 데이 Daniel Day)[5]의 하이패션의 ‘재-전유(專有)’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깔끔하게 차려 입고, 과도하게 자신을 꾸미며 외모에 대해 대단히 열정적인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많은 유명세를 얻었던 그의 가게와 디자인은 스포츠 스타, 허슬러, 힙합 아티스트들을 고객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밍크, 타조, 악어를 사용하여 “마초스럽고 민족적인 게토 스타일의 옷”을 “아프리카화 된 오트 쿠튀르”로 만들었다.

구찌, 루이비통 등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디자인을 베낀 대퍼 댄의 디자인에 법적 조치가 취해졌고 이후 그는 언더그라운드 패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2017년 구찌 크루즈 컬렉션은 1989년 올림픽 단거리 선수인 다이앤 딕슨 Diane Dixon을 위해 만든 재킷을 포함해 대퍼 댄의 디자인이 다수 소개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2017년 가을 전시에 그의 작품 일부를 [전시에] 초대하기도 했다.

[1] 로웰 공장Lowell Mills: 로웰 공장은 19세기 미국 메사추세츠 주 로웰시에서 운영되었던 텍스타일 공장으로 프란시스 카콧 로웰 Francis Cabot Lowell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월트햄-로웰 시스템 Waltham-Lowell system’이라고도 하는 “로웰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제조 시스템을 도입했다.

[2] 파추초 pachucho: 10대의 길거리 깡패, 특히 멕시코계 미국인을 의미한다.

[3] 주트 수트 Zoot Suit: 허리까지 올라오는 통이 넓은 바지와 두툼한 패드를 어깨 부위에 넣은 긴 코트를 입은 외양을 일컫는다. 1930-40년대에 걸쳐 아프리카계 미국흑인, 멕시코계 미국인 등의 사이에서 유행했다.

[4] Zoot Suit Riots: 1943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주트 수트를 착용한 멕시코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폭동. 1943년 디트로이트, 알라바마, 텍사스, 버몬트 등의 미국 각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이루어진 인종 폭동의 하나였다. 라틴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 기반한 이 폭동은 미국 군인들과 로스앤젤레스의 백인들은 주트 수트를 입은 젊은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고 1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5] 대퍼 댄 Dapper Dan(1944-): 뉴욕, 할렘 출심의 패션 디자이너, 주로 힙합, 스트릿웨서 등을 하이패션과 믹스매치하는 디자인을 선보였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구찌, 루이비통, 펜디 등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를 자신의 디자인에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Poncho Huayruru                              17

항상 용맹한 전사로 알려진 폰초스로호스는 볼리비아에서 새로운 ‘원주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2006년에 아이마라 다수민족 출신에서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로, 현지인들의 신뢰를 향상시킨 것을 보여준다. 볼리비아 아차카치의 웹페이지에서, 폰초스로호스는 그들을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Evo morales Ayma)가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볼리비아 육군예비대는 새로운 볼리비아 연립국가의 권력의 일부로 토착국가들이 편입되는 과정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현지 민병대으로 바뀌었다.” 폰초스 로호스는 산타크루스 부처의 지주들의 분리주의자와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들에 맞서기 위한 현지 민병대로써, 오래된 볼리비아 리퍼블릭의 인종차별자들이 재 집합하는 것에 경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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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mall ration of this ‘flimsy fabric’ of unbleached cotton was given to North American slaves to make their own clothes. It was considered important that there was a gulf between the dress of master and slave, but using the indigo they were forced to pick and make into a dye, negro women outraged the Law by dressing ‘beyond their condition’.

북미노예들이 입을 옷을 만들라고 주어진 천은 표백되지 않은 면 원단의 ‘얇은 천 flimsy fabric”이었는데, 그나마도 넉넉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복장 차이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천을 염색하기 위해 인디고를 사용했던 흑인 여성들은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는’ 옷을 입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법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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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ies of solidarity the weavers of Cuddalore, India created against the oppressive demands of the East India Company “were not fixed, but continually made and remade … and demonstrated extraordinary inventiveness, resourcefulness and creativity”.

인도 쿠달로르 지역의 직조공 연대는 동인도 회사의 강압적인 요구에 대항하여 결성되었다. 이 연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진다… 또한 뛰어난 독창성, 지략성resourcefulness, 창의성을 증명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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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peace in my heart, nor my head, nor my blood that will itch until we have killed them all, or they have run away. But for this night fold me in your weave, warm me, make me a potato in the soil and bring me sleep before I join the others.

이제 내 마음도 머리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거나 도망가는 걸 보기 전까진 온통 혈관이 근질거립니다. 하지만 오늘 이 밤만은 당신의 판초로 나를 감싸고 흙 속의 감자처럼 따듯하게 날 지켜주세요. 형제들과 모여 다시 싸우러 가기 전에 나를 잠으로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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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cho Huayruru | 폰초 후아이루루

20세기 후반, 라파스[1]에서 2010년에 구입한 양모. 항상 용맹한 전사로 불렸던 븕은 판초 부대Ponchos Rojos[2]는 볼리비아에서 새로운 ‘원주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2006년 다수부족인 아이마라[3]족 출신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선출된 후 [붉은 판초 부대는] 현지인들의 신뢰를 더욱 많이 받았다. 리비아 아차카치[4]의 홈페이지에는, 붉은 판초 부대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에보 모랄레스 아이마Evo Morales Ayma[5]는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토착원주민 국가들을 새로운 볼리비아의 연합국가로 안전하게 포섭하기 위해 볼리비아 육군예비대를 민병대로 전환시켰다.” 붉은 판초 부대는 산타 크루스 정부 부처 지주들[이라 할 수 있는] 분리주의자와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들에 맞서기 위한 현지 민병대로써, 과거 볼리비아 공화국 인종차별자들의 재결집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들이 입은] 붉은 판초는 매우 신성시되었다. 붉은 판초는 비상시국[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입을 수 있었다. “공동체에 봉사하고 인정받는 50세 이상의 남성만이 붉은 판초를 입을 수 있었으며, 그들 중 특히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남자는 검정 줄무늬가 들어간 판초를 입었다. 검정 줄무늬 판초의 이름이 후아이루루였다.” 붉은 판초 부대는 볼리비아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분시키기도 했다. 그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한 곳인 아차카치 주민들 사이에서는 붉은 판초 부대가 말 그대로 적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2007년 ‘그레이트 바라크 오브 왈라 카차Great Barrack of Wala Chaka ‘라는 반정부 집회에서 [붉은 판초부대가]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두 마리의 개를 고문하고 참수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이 이야기는 [그들이] 적을 잡아먹는다는] 그 소문을 사실로 확인해주는 것 같았다. 이러한 위협은 이 지역의 주요 자원인 천연가스의 국유화와 재분배에 반대했던 산타 크루스, 베니, 판도, 타리하[6]의 ‘반달'(Media Luna) 부서와 정부가 발표한 토지개혁 정책을 겨냥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전부터 안데스 튜닉은 계속 겉옷 안에 입었지만, 17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은 판초를 원피스처럼 입고 다녔다. 판초는 일반적으로 마푸체로부터 유래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마푸체 사람들[7]은 말이 도입된 다음에 판초를 입기 시작했다고 한다. 판초를 짜는 데 6개월 정도 걸리며,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붉은 색과 검은색의) 후아이로 판초는 절기, 퍼레이드, 공식 행사, 선거 등 기념 행사와 종교 행사 때 입는다. 분홍색 판초는 카니발과 같은 축제에 입고, 오렌지색은 지역사회의 내부 행사가 있을 때, 초록색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를 발표할 때 입는다. 그리고 노발색(흙색)은 주로 겨울에 입는다.

“패션을 재단하고 맞춤에 의존하는 것은 계속해서 천을 짜는 행위가 영적인 힘을 전달한다는 생각과 상충한다. 비교적 비상업적인 분야에서는 천을 자르는 것을 여전히 금기시한다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예를 들어, 일부 인도네시아인들은 입는 옷감과 신부의 예단 위한 옷감을 지금도 구별한다. [일상에서] 입는 옷을 위한 옷감은 자르고 꿰매지만, 신부의 예단을 위한 옷감을 짤 때에는 실이 끊이지 않게 하여 ‘연대감과 혈통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1] 라파스(스페인어: La Paz, 아이마라어: Chuqi Yapu, 문화어: 라빠스)는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이다. 1548년 에스파냐의 알론소 데 멘도사 선장이 건설했다. 알티플라노 고원에 위치해 평균고도가 3600m에 달한다. 티티카카 호가 가까이 있다.

[2] 폰초스 로호스 Ponchos Rojos, 즉,  붉은 판초 Red Ponchos는 오마수이스Omasuyos의 안데스 지역에 있는 볼리비아 군대로, 아이마라Aymara 예비군을 포함하는 민병대를 뜻한다.

[3] 아이마라족은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과 알티플라노 고원 지역의 민족이다. 볼리비아와 페루, 칠레 등에 약 2백만 명이 있다.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라족이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최초로 소수민족이 정치인이 되었다.

[4] 아차카치(스페인어: Achacachi)는 볼리비아 라파스 주에 위치한 도시로 높이는 3,854m, 인구는 8,857명(2012년 기준)이다. 티티카카 호 동안과 접하며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스에서 북서쪽으로 9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5]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 2006년-2019년 아이마라족 출신의 대통령으로 스페인 정복후 470년이래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6] 타리하는 볼리비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타리하 주의 주도이며 면적은 401km², 높이는 1,854m, 인구는 234,442명이다.

[7] 마푸체(Mapuche)는 현재의 남아메리카 칠레 중남부와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지방에 걸쳐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전통적으로 마푸둥군어였고 현재는 에스파냐어를 쓰는 사람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