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ylic Rope                                      47 

The garments stored in the Imperial wardrobe of the Mughal Emperor Akhbar, a cloth connoisseur who took a managerial role in its production, were arranged according to the days, months, and years, of their entries, and according to their colour, price and weight.

무굴 제국의 황제 아크바르는, 옷감 생산을 관리 감독했던 직물에 관한 전문가로, 그의 황실 옷장에 보관되어 있는 의복은 들어온 일, 월, 년도에 따라, 또 색상, 가격, 무게에 따라 배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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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rments stored in the Imperial wardrobe of the Mughal Emperor Akhbar, a cloth connoisseur who took a managerial role in its production, were arranged according to the days, months, and years, of their entries, and according to their colour, price and weight.

무굴 제국의 황제 아크바르는, 옷감 생산을 관리 감독했던 직물에 관한 전문가로, 그의 황실 옷장에 보관되어 있는 의복은 들어온 일, 월, 년도에 따라, 또 색상, 가격, 무게에 따라 배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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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Buenos Aires 6 undocumented Bolivian migrants were killed by a fire in a garment workshop where over 60 worked in slave-like conditions. As in so many richer countries, a textile industry is maintained by allowing a level of illegal immigration so as to compete with low-waged producing countries.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6명의 불법체류 볼리비아 이주자들이 노예같은 환경에서 60여명이 일했던 의류 작업장에서 화재로 사망했다. 많은 부유한 나라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섬유 산업은 저임금 생산국들과 경쟁하기 위해 불법 이민을 일정 수준 허용함으로써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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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worked as a shoeshiner for 45 years, since I was 14 years old. There’s a lot of abandoned people here, left in the streets with nothing. That’s what I see here in La Paz. Here in Bolivia, people have to leave. Things have changed a little bit, but let’s hope they change a bit more, you know? Because what’s changing is still not enough, we still need more changes, a few more changes.

나는 14살 때부터 45년간 구두닦이로 일했습니다. 여기에는 버려진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아무것도 없이 거리에 남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 라파스에서 내가 보는 것입니다. 볼리비아의 이곳에서 사람들은 떠나야 합니다. 상황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좀 더 변했으면 좋겠는데, 알죠? 변화가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변화, 조금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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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케 엥겔 Antke Engel

나는 하이브리드라 할 수 있는 어떤 남성정장suit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비즈니스 정장과 나들이 옷 Sunday best 사이 쯤에 적합한 변형된 형태의 정장으로 조깅복처럼 편안하며, 적절한 곳에 전시되면 디자이너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드러운 알파카 원단과 섬세한 흑백의 패턴이 그 옷을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이 패턴은 첫 눈에는 헤링본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떤 전형적인 양복 원단과도 유사하지 않다. 이 원단에는 지그재그로 둘러싸인 손가락만한 사각형 가운데 작은 점이 있고 무연탄의 지면에 흰색이 있으며 고운 섬유이기보다는 거친 천이다. 트위드? 너무 장난스럽다. 체비엇 Cheviot[1]? 훨씬 더 부드럽다. 나는 이 옷을 우연히 보게되었고, 처음는 이 양복의 배경이나 이야기에 대해 아무것도 추측할 수 없었다. 그후 나는 이 옷이 볼리비아에서 왔으며, 우연히 유럽에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정장이 [유럽에 오기를] 갈망해 왔다기보다, [어쩌다] 기회가 되어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가까워졌을 때, 그 양복은 내가 그것의 메스티자 mestiza[2]적 존재에 더 많은 층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메스티자, 나는 그것이  하이브리드가 아니라고 배웠다) 양복의 안감은 밀가루 봉지로 만들어졌고, 이전의 용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생산을 담당하기 보다는 재현을 뒷받침하는 오래된 존재이지만, 식품 산업에서의 힘든 노동 생활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니, 생계형 생산이 아니다. 에크루 리넨 ecre linen에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인쇄된 시각 디자인과 제품 정보는 어떻게 해서든 세계화된 경제에 관련된 사업을 나타낸다. 사실, 이것이 메스티자의 모든 것이다. 이들은 세계 시장 경제나 식민지 역사의 여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질적인 역사와 사회 문화의 유산을 주장한다. [메스티자는] 토착민 생활, 이주, 출산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적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접경 지대에 거주하며 결코 순수하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은 태도로부터 진화하는 주체성과 관계성을 그들의 힘의 원천으로 만든다. 당신은 볼리비아 시골의 어느 작은 마을의 지역 시장에서 메스티자의 존재[이 양복]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판매중인 이 양복은 원주민 여성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녀는 자본주의 비즈니스 협상, 부르주아 정치, 기독교 제도, 또는 서구주의 지식의 지형에 들어가는 사람을 위한 고전적인 ‘재단’의 비즈니스 에 맞추기 위하여 감히 전통적으로 직조된 천을 잘랐을 것이다 (이는 천은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르는 행위로 인해 상처입으면 안된다는 모든 전통적인 지식을 공격하는 행위이다). 그 동안 당신은 세계 정치에서의 입지를 요구하는 메스티자헤mestizaje[3]를 발견할 수도 있다. 에콰도르(2008)와 볼리비아(2009)의 새 헌법은 내가 베를린에서 보았던 맞춤 정장과 형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사유재산권과 국권을 수호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와 신자유주의 국가주의를 수막 카우세이sumak Kawsay(좋은 생활, buen vivir)와 모든 존재의 나눌수 없는 유쾌함(어머니 지구, pachamama, madre tierra)의 원리에 굴복시키는 혼성적인 존재들이었다. 헌법은 국가를 다원성과 다양한 형태의 재산, 생산과 번식을 포함하는 경제적 형태의 복수성(다양성경제)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자연을 권리의 주체로 선언하고, 지구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원의 활용 가능성을 제한하며, 거대 부동산의 크기를 제한한다. 그러나, 경제를 조직화하는 유일한 형태로서의 자본주의 경제의 독점은 깨졌지만, 세계 시장, 사유 재산 그리고 초국가적 기업들은 여전히 국가 상태를 유지하는 중요한 계기로 찬양 받고 있다. 서로 다른 형태의 경제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대단히 불평등한 권력관계, 지배와 착취가 그들의 관계를 구조화하면서 서로 경쟁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미스터리는 서류상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시장 경제와 가정, 생계, 공동체, 연대 경제 사이의 교환 경로는 반자본주의적 재분배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소반 Asoban(볼리비아의 민간 은행 협회)은 에보 모랄레스 Evo Morales 대통령의 소액 신용 대출자에 대한 채무 경감 요청을 거부했다. 페미니스트 조직 무헤레스 크레안도(Mujeres Creandos, 여성창조)의 부채 상환을 위해 사람들이 서명한 청원서 더미를 제출하려는 캠페인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200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회의에서 자국의 석유 자원이 개발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을 국가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야스니 국립공원을 구하려는 에콰도르의 계획은 초국가적 기업이나 에콰도르 주주들에게 어떤 공명이나 감명도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종이 헌법의 살아있는 형제이자 지역의 접경 지대의 거주자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이 메스티자 양복이 어떻게 서로 다른 경제와 좋은 삶의 방식 사이의 교환을 연결하고 가능하게 하는 교통수단이 될 뿐 아니라, 세계화된 시장 경제의 지배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 가정과 생계, 공동체, 단체 그리고 연대 경제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1] 체비엇 Cheviot: 체비엇 양털로 짠 모직물

[2] 메스티자 mestiza: mestizo의 여성형. 인종이나 민족 조상이 혼합된 여성, 특히 라틴 아메리카, 아메리카 인디언과 유럽계 혼혈을 의미한다.

[3] 메스티자헤 mestizaje: mestizo와 mestizaje라는 단어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메스티자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더 큰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과 원주민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수 세대에 걸친 스페인 아메리카의 이민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대한 민족과 문화적 혼합물이다. 따라서 21세기의 메스티자제에는 유럽 및 토착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과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도 포함된다.

(https://www.smith.edu/vistas/vistas_web/units/surv_mestizaje.htm, 2020.05.17 접속)

참고자료

  1. 영어권에서는 봉건시대의 소작농을 의미하는 농민(peasant)과 근대적인 농업경영자를 의미하는 농민(famer)을 구분하고 있으나, 스페인어권에서는 양자를 포함하여 직접적으로 농업노동을 담당하는 농민을 모두 소농(campesino)으로 표현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농민과 식량주권|작성자 살구나무

  1. https://aha.confex.com/aha/2013/webprogram/Paper12121.html
  2. https://intopassion.tistory.com/entry/The-straw-that-broke-the-camel%E2%80%99s-back-%EC%9D%98%EB%AF%B8%EB%8A%94
  3. The peasant communities of highland Peru experienced a relatively calm relationship with the new national state along most of the 19th century. The weakness of successive central Peruvian governments between the Wars of Independence (1810-1825) and the War of the Pacific (1879-1883) may explain in part this rural calm, especially if compared with the well studied 18th-century rural rebelliousness that occurred in the Viceroyalty of Peru during the Bourbon Era. Despite the numerous civil wars confronting different regionally-based “caudillos,” only two peasant rebellions occurred in this post-Independence period: in Huanta, Ayacucho (1827-1829), and in Huancan and Azángaro, Puno (1866-1868). The Indian rebellion in these two Northern provinces of Puno involved the participation of a famous “mestizo” traveler, Liberal politician, and pro-Indian activist, Juan Bustamante (1808-1868). His intermediation and eventual leadership of the movement, which actually cost him his life, has ironically obscured our knowledge and understanding of the indigenous leadership of the rebellion. The paper explores the local system of indigenous community authority in the North of Puno, to better understand their actions in a rebellion that started as an anti-tax protest and ended as part of the civil war between Liberals and Conservatives in 1860s Peru.
  4.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Ramon-Castilla
  5. Bustamente rebellion (1866-1868)
  6. In 1852, Peru promulgated its own civil code (based on a project of 1847), which was not a simple copy or imitation of the French one, but presented a more original text based on the Castillan law (of Roman origin) that was previously in force on the Peruvian territory.
  7. A brief history of Peru

https://books.google.co.kr/books?id=vaawuxOTpOMC&pg=PA165&lpg=PA165&dq=peru+%221852%22+wool+trade+William+Ricketts&source=bl&ots=EHVxf7rqNH&sig=ACfU3U3coi9hq4_nzZjeR6SBs7EDSkycJA&hl=en&sa=X&ved=2ahUKEwiyj4uSmY3rAhVHw4sBHSRiDBkQ6AEwAHoECAoQAQ#v=onepage&q=peru%20%221852%22%20wool%20trade%20William%20Ricketts&f=false

  1. https://www.jstor.org/stable/3338346?read-now=1&seq=4#page_scan_tab_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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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페루인과 아프리카 노예 600만 명이 230년에 걸쳐 산의 은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은의 채굴, 분쇄, 안입 가공, 운반 과정중에 탈진, 호흡기 질환,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 이미지에는 '저승의 제왕'으로 추정되는 엘티오 El Tio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는 광산을 지배함과 동시에 보호와 파괴를 관장한다.
안데스 부활절 기념행사의 일부로 전시된 직물과 함께 세워진 아치 장식

부스타만테Bustamente의 반란으로 알려진 페루 우앙카네Huancané[1] 지방의 캄페시노Campesino(농민) 폭동이 올해[1866년] 시작되었다. 인도의 새로운 인두세[2]는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마지막 하나의 지푸라기(the straw that broke camel’s back)+각주’였다.(영국인 울 상인 윌리엄 리케트William Ricketts가 페루에 도착한 해인) 1852년에 [제정된] 민법이 페루 남부의 인디언 공동체의 부담과 분노를 가중시켰다. [이 법은] 인디언에게 제한된 시민권을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전통적인 집단적 존립권에 대한 공격이었고, 그들을 개별적인 계약에 종속되게 만들었다. 울의 수출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던 무렵 민법도 제정되었다. 그 결과, [스페인의]  토지 보유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히스패닉화된 대농장(haciendas)과 인디언 농민 소유지(estancias)의 비율이 거의 비슷해졌다. 1860년대에 스페인의 140개의 공증된 토지 매입이 이루어졌고, 1867년에 정점을 찍었다. 이것은 정치-문화적 공세로 진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평등한 대우를 받았던 특권층 원주민들도 그렇지 못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역학 관계는 군사적 약탈외에도 “값싼 울을 찾아 고산지대를 돌아다니는 상인들의 증가”를 의미했는데, 값싼 양과 알파카의 울은 ‘계약’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허울뿐인 계약이었다. ‘값이 싸다’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울 상인 대리인(울 중개상)이라 할 수 있는  레스카티스타 rescatista는 ‘대출’이나 값비싼 영국 상품을 선금으로 지급하였고, [생산된 울의] 양이 부족하거나 품질이 나쁘다고 주장하며 대신 땅이나 동물들을 빼앗았는데, 그들의 배후에는 무장한 세력이 있었다. 세계 시장에서 양털 가격이 높을수록 이 과정은 더욱 극심해졌다. 이것은 페루의 엘리트들과 (이후 국가 채무 불이행으로부터 페루인들을 ‘구제’하게 될) 영국의 금융자본가 모두 수출 주도 경제가 그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인디언 문제가 국가적으로 시급한 우선순위는 아니었지만, 농업자본가, 상인, ‘문명의 대리인들’은 인디언 산악지대의 재 식민지화를 열망하는 정치인들의 관심을 요구했다.” 페루 정부는 “테러에 관한 법률”을 사용하여 봉기를 진압하고 테러 상황를 설계했다. 리마에서 ‘인디언 사회 동맹 Sociedad Amiga de los Indios’을 결성한 떠돌이 상인들의  ‘대령(colonel)’이라 불렸던 후안 부스타만테[3]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인디언 사회동맹은 ‘원주민’의 ‘후진성’에 대해 우려해 왔지만, 부스타만테는 공동체를 자유민으로도 시민으로도 간주하지 않는 이러한 조건이 가지고 있는 의도와 물질적 영속화에 반대했다. “인디언의 갱생에 반대하고 선의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켰다… 인디언의 무지와 굴욕, 포기를 악용하여 그들의 부를 축적하였다.” 그의 희망은 ‘자발적인’ 봉기가 이러한 악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채 푸노Puno[4]의 군대에 패배했다. 부스타만테와 60명의 인디언들이 처형되었고 “반란을 일으킨 고원지대 마을은 전멸되고, 주민들은 카라바야Carabaya[5]의 푹푹찌는 정글에 있는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1881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군에 맞서 싸운 원주민들은 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이 상황을 그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1882년부터 1884년까지 반란을 지속했다. 결국 대농장 관리자들이 암살되고 ‘협동자’ 대농장haciendas도 점령되었다. 1884년 마침내 게릴라 지도자들이 붙잡혀 처형되었지만, 그 반란은 대농장 소유주들이 원주민 지역사회를 다루는데 있어 더욱 신중해지게 만들었고, 부스타멘테 반란을 촉발시킨 대농장이 확장되는 사태를 막았다.

[1] Huancané는 페루 Huancané 지방의 수도로 티티카카 호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Huancané의 7,000 명의 거주민 대다수는 Aymara를 사용합니다

[2] 인두세(人頭稅, tax per head; poll tax)란 사람 머릿수에 맞추어 걷는 세금을 말한다. 영국 역사상 1380년에 부과된 인두세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1381년 와트 타일러가 이끈 농민반란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3] Juan Bustamante Dueñas는 페루의 원주민 지도자로, 사회 정의를 요구하며 1867년부터 1868년 사이 푸노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4] 푸노(Puno)는 페루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푸노 주의 주도이다. 푸노 시는 티티카카 호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푸노 지방과 푸노 도의 중심 도시로 인구 약 100,000명을 가지고 있다.

[5] 카라바 야 지방은 페루 남부 푸노 지방의 지방입니다.



Silver 은

헤겔에겐 상호관계의 호혜성이란 개념이 없다. 이 도판을 보면, 주인이 노예의 의식을 비웃고 있다. 주인이가 노예에게 원하는 것은 공로를 알아주는 인식이 아니라 단지 일하는 노동력일 뿐이다.

8~13 세기에 구성되고 수집된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에는  포목[1] 도매상들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지만, [그 이야기 안에] 의복 자체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의복들에는 종종 금이나 은사가 들어가 있었다. 호머의 작업들과 아시리아 조각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이미 이러한 금속들의 활용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도 다수의 전문적인 장인을 통해 그러한 실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예술이었다. 일반적으로 ‘금’사金絲라 하면 은에 [금을] 도금한 것이었는데, 도금에 사용된 은 자체는 순은이었다. 은사銀絲는 [은을]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진 실 뽑는 전용 판을 통과시킨 다음 윗 부분이 둥근 모루[2] 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겨 순은 또는 금으로 도금된 은으로 된 둥근 바bar 형태를 만든 후에 이것을 가늘게 실로 뽑아낸 것이었다. 또한 실크나 리넨과 같은 직물을 짜는 실을 가운데에 두고 납작한 금속소재를 단단히 감싸서 은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들은 비잔틴 제국과 후기 유럽에서 부자들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옷에 사용되었다.이러한 저속한 화려함은 직물 자체를 크게 변형하며 옷감을 지나치게 무겁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를 모방한 모조 실들이 개발되었다. 멤브레인 골드와 멤브레인 실버라 불리는 모조실을 개발한 결과 훨씬 더 많은 직물에 금속소재가 사용되게 되었고, 의상 한벌에 들어가는 고가의 금속 사용을 줄일 수 있었다.

직물의 역사에서 은의 진정한 의미는 은이란 금속 자체의 채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1545년에 거의 산 전체가 은 광석으로 만들어진 광산(Cerro Rico)[3]이 지금은 볼리비아Bolivia에 속지만 당시에는 페루 부왕령에 속했던 포토시Potosí에서 발견되었다. 이 엄청난 은광은 당시 부의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라마와 노새의 등에 짐을 싣고 팔던 상인들은 마치 입[4]에서 피를 흘리는 듯 은을 쏟아내는 포토시 광산에서부터 아리카Arica의 항구로 은을 실어 날랐다. 긴 항해 끝에, 유럽에 도착한 은괴는 유럽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진보를 위한 자금줄이 되었다.” [여기에서] ‘진보’란, 유럽 자본주의의 시작과 세계 무역 패턴들의 변화로부터 이루어졌다. 수억 페소에 달하는 은이 채굴되고 정제되어 포토시 조폐국(Casa de la Moneda)에서 주화로 만들어졌다. 생산과 수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광산 소유자들은 노예 노동(mita)이 필요했다. 원주민과 납치된 아프리카 노예들의 짧은 노동 생활은 유례없이 잔혹했다. 그래서 1659년 페루의 총독인 레모스 백작Court Lemos이 스페인 국왕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세상에 이보다 더 지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폐하께 분명하게 전달함으로써 내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자 합니다. 스페인으로 가져온 것은 은이 아니라 원주민들의 피와 땀입니다.” 마드리드의 서인도 식민청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들은] 광산에서 행해지는 강제 노동에 대한 금지에 반대했다. [그 결과] 광산 노동 기간인 1556년부터 1783년 동안 800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채굴된 은은 인도의 직물 생산자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유럽 무역상이 제공 할수 있게 했다. 이전에는 그들이 인도의 직물 생산자들에게 제공할 것이 거의 없었다. 은이 금보다 순도가 낮다고 여겨졌으나, 중동, 인도, 중국 전역에서 [이미] 주화로 사용되고 있었다.“지금까지의 벵골의 국제무역에 관하여 말하자면, 국제 시장에서 벵골의 직물과 실크에 막대한 수요가 있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의 구매자들을 매료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650년에서 부터 1757년 사이의 벵골은 자급자족할 수 있었고, 수입 상품 시장은 엄격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포함한 거의 모든 무역상은 벵골에서의 수출 상품을 조달하기 위해 귀금속, 주로 은을 가져와야 했다. 따라서 17세기와 18세기 초반에 은이 벵골로 유입된 것은 벵골이 세계 나머지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유리한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역의 범위와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중개인으로서 유일무이한 역할을 했던 인도 면화 산업과의 이러한 접촉은 유럽인, 특히 영국인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해군력과 아프리카 노예를 사용하면서 면직물의 생산법을 모방하고 산업화하여 세계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자극했다.

한편, 광산에서 노예를 착취하여 벼락 부자가 된 포토시 광산 관리자들은 – 세상이 자신들의 것인 마냥the world their oyster[5]– 전 세계에서 고급 직물을 수입하고 마을을 말그대로 은으로 도배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급 직물은 안데스 은으로 만든 은판Solid-cut sheets을 [수출하여] 스페인에서  금속 방적사Metallic yarn[6]로 만들고 포토시에 다시 역수입된 원사로 제작했다. 전통적인 기술과 미감(good taste)을 가지고 있던 원주민 방직공들은 열정적으로 하지만 아껴가며 실크, 리넨, 또는 면 코어 얀(core-yarn)에 은사를 감았고, 때로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대안적으로 노란색과 흰색 실을 번갈아 사용하기도 했다. 사진과 컴퓨가 등장하면서, 은은 더 이상 가치와 아름다움 때문에 단순하게 갈망하게 되는 금속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변했다. 은은 뛰어난 전기 전도체이고, 사진 처리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며, 컴퓨터와 전자 장비에는 물론 영화제작 과정에서도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2003년 스포츠 패션 카탈로그에 소개된 란제리와 ‘액티브 웨어’에는 “은 이온이 직물에 내장되어 있어  냄새를 방지하고 옷에서 세균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쓰여있다

[1] 포목(布木): 베와 무명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모루: 단조나 판금작업 때 공작재료를 얹어놓고, 해머로 두드려 가공하는 대

[3] Cerro Rico: 볼리비아의 산이며 스페인어로 “rich mountain”이며 Cerro Potosí 로 불리우며 볼리비아 도시 Potosí 근처 안데스 산맥에 있는 산

[4] 광산 입구를 은유적으로 표현

[5] the world is thier oyster: “the world is your oyster”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The Merry Wives of Widsor’(윈저의 행복한 아낙네들/17세기) 극본에 처음 등장했으며 세상은 당신의 굴이라는 말은 당신에게 기회와 능력이 있기때문에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거나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 메탈릭 얀(Metallic Yarn):가느다란 금은실 (金銀線)등을 평평하게 압연한 실



Man's Suit 남성 정장

밀가루 포대에서 추출한 목화 안감 모직물; 2010년 푸노Puno의 골동품상에게서 구입. 현재 페루에서 토착민족들이 서양 복식으로 옷을 갖춰 입는 것을 [일컬어서] 문명화된 사람들이 civilizarse, ‘누군가를 교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만일] 그들이 너무 가난해서 옷을 살 돈이 없으면 어떤 특정 가게에 가서 옷을 빌려입기도 한다. 밀가루 면직 포대를 잘라 만든 안감을 손으로 짠 이 정장의 옷감은 영국식 트위드tweed[1]를 흉내내고 있다.

1575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권위를 내세운 톨레도Toledo 총독은 잉카 식 복장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안데스 원주민들이 “우리식(스페인 식) 옷을 입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장려했는데 이는 안데스 원주민들이 스페인 식의 복장, 즉 셔츠, 바지, 치마, 블라우스를 입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떤 옷이든 “상처와 애통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것만 입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스페인 법령은 사회 계급별로 입을 수 있는 옷과 시기를 법으로 정해 놓음으로써 사치스러운 직물의 사용을 통제했었다. 식민지 페루 부왕령에서도 이와 유사한 법으로 사회 계층과 인종 구분에 입각해 복장을 규제했다. 예를 들어, 원주민 여성이 입을 수 있는 비단의 양은 제한되어 있었고, 그녀의 망토에 붙일 수 있는 레이스 조각의 개수 역시 정해져 있었다.

1571년 당시 혼혈 여성은 비단 망토, 금, 진주 같은 것을 착용하는 것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18세기에는 과하게 사치스러운 옷을 입은 듯한 안데스 원주민을 향한 불쾌감이 부왕권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그 결과 원주민들이 “우리(스페인 사람)처럼 입는 것이 금지”됐다 (1791년 법률 개정판, p.403). 그 즈음, 투팍 아마루 혁명Túpac Amaru rebellion[2]의 결과로 잉카 식의 옷이 급속도로 정치적인 색을 띄게 되자 행정관들은 이를 걱정하기 시작했으며, 1781년에는 이러한 옷을 입는 것을 불법으로 만듦으로써, 다시는 옛날 통치자들의 이상적인 모습과 고대의 기억을 불러내지 못하게 했다.
반면 같은 시기의 잉카 복장은, 쿠스코Cuzco와 포토시Potosí의 1555년 성체축일Corpus Christi[3] 행진에서 과거를 재연하고 잉카문명의 유산을 ‘연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처럼, 잉카 복장은 식민지 민중을 보여주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보존된 많은 식민지 튜닉tunic[4] 역시 특별히 민중 행진을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안데스 원주민의 느슨하게 감긴 드레스가 ‘외설/무례함indecency’을 보여준다고 우려한 1570년대 부왕령 행정관들은 (그들의) 옷들을 꿰맬 것을 요구하는 법을 제정했다. 잉카의 몇 태피스트리tapestry[5]  이크야lliclas(숄)[6]의 표면에는 가짜 솔기가 수놓아져 있다. 이는 랩 무늬 망토의 두 깔루callu가 맞붙는 선을 모방한 것으로, 법에 대한 저항의 행동일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내용을 넣어 미적 형태를 이어가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1] 트위드tweed: 비교적 굵은 양모를 이용, 간간히 다른 색깔의 올을 가미하여 수평 수직으로 짜낸 두꺼운 천.

[2] 투팍 아마루 혁명Túpac Amaru rebellion :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항했던 운동이다. 투팍 아마루 1세는 스페인의 정복에 대항하다 페루 부왕 톨레도에 의해 1571년 처형됐으며, 200년 후엔 투팍 아마루2세가 안데스 지역 광산에서 혹사 당하는 원주민을 위해 스페인에 대항하여 운동을 일으켜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상징적인 보복을 했으나 처형당했다.

[3] 성체축일Corpus Christi: 그리스도교 축일 중 하나이다.

[4] 튜닉tunic: 헐렁하고 긴 상의를 말하는데, 보통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여성용의 낙낙한 블라우스 또는 코트이다. 모양은 소매가 달린 티(T) 자 형이고 보통 허리에 벨트를 매어 입는다.

[5] 태피스트리tapestry: 여러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혹은 그 제작 기술.

[6] 이크야Lliclas: 페루 여성 전통 의상으로, 여인들이 사용하는 숄, 어깨걸이.

 

 

Man’s Suit                                            41

항상 용맹한 전사로 알려진 폰초스로호스는 볼리비아에서 새로운 ‘원주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2006년에 아이마라 다수민족 출신에서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로, 현지인들의 신뢰를 향상시킨 것을 보여준다. 볼리비아 아차카치의 웹페이지에서, 폰초스로호스는 그들을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Evo morales Ayma)가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볼리비아 육군예비대는 새로운 볼리비아 연립국가의 권력의 일부로 토착국가들이 편입되는 과정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현지 민병대으로 바뀌었다.” 폰초스 로호스는 산타크루스 부처의 지주들의 분리주의자와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들에 맞서기 위한 현지 민병대로써, 오래된 볼리비아 리퍼블릭의 인종차별자들이 재 집합하는 것에 경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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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pite the prominence of silver thread used in the clothes of the rich and powerful, its real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global textile trade was in its mining, specifically from Spanish colonial Potosi. Millions died in extracting it while it provided, for the first time, a commodity for Europeans that the producers of cloth and spices in Asia actually wanted.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옷에 은사가 많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섬유 무역의 역사에서 은사의 진정한 의미는 광업, 특히 스페인의 식민지 포토시Potosi에서 시작된 광업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는 아시아에서 옷과 향신료를 만드는 사람들이 원했던 그 은이 처음으로 유럽인들을 위한 상품으로 공급되는 동안, 은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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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Peruvian province of Huancane, peasants rose  in the Bustamente rebellion against the re-colonisation of the highlands by agrarian wool capitalists, merchants and ‘agents of civilisation’.

페루 우안카네Huancane 지역에서 일어난 부스타멘테 반란에서 양모 자본가, 상인, ‘문명의 대리인’이 고산지대를 다시 식민지화하는 것을 반대하며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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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ctually, what mestiza is all about: Acknowledging that one cannot escape global market economy or the aftermath of colonial history, yet claiming the legacy of heterogeneous histories and social cultures.

사실, 이것이 메스티자 mestiza 가 의미한 모든 것이다. 이들은 세계 시장 경제나 식민지 역사의 여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질적인 역사와 사회 문화의 유산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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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Quispe | 후안 끼스페

“내 이름은 후안 끼스페Juan Quispe이다. 나는 티티카카[1] 호수Lake Titicaca 의 타킬레[2]Taquile 섬에 살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입고 있는지, 특히 여자들이 엮어 만든 파하 faja (넓은 벨트)와 남자들이 짠 추요 ch’ullu (울모자)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러나 먼저 너그러움(generosity)의 표시로 해석되는 천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예를 들어] 내가 비록 천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천이 가지고 있는 그 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그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자연은 항상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베풀것이다. 내 말은, 음식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고, 영혼이 피폐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기쁨 역시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천은 결핍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그 끝자락에 있다.  파하와 추요에 사용되는 상징은 우리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다. 예를 들어 현대 달력이 도입되었지만, 달력 벨트(chumpi calendario)를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새, 꽃, 농작물의 짜임새 패턴을 통해 시간을 본다. 우리는 집을 짓는 시기와 낚시철을 읽는다. 그리고 [그 벨트에는] 망자의 날, 새로운 동물의 탄생, 새해와 같은 몇몇 축제들이 적혀있다. 우리의 조부모님들도 같은 우주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의 직물은 발전되었고, [지금은] 무지개 색을 꽤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께 많은 색을 만들 수 있었는데도, 왜 조상들은 무지개 색을 사용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조상들은 무지개를 경외시했고, 무지개 색은 사람을 태우거나 장(腸)을 꺼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변하고 있고, 우리는 무지개 색을 사용해서 [사람을] 불에 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조부모님들은 그런 식으로 무지개를 경외시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6월이나 5월에 무지개가 지면, 비가 곧 그칠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해가 질 때 무지개가 있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해가 뜰 때 무지개가 있다면 비가 올 것이다. 이것이 [일기]예보다. 아마도 우리 조부모님의 태도는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색상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직물이 발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 내 여동생 중 한 명이 파하에 우주 왕복선 이미지를 엮였던 적이 있다. 나는 동생에게 왜 [우주선을] 엮었는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물었고, 여동생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해에 챌린저 우주왕복선[3]이 이륙 직후 공중에서 폭발했을 때, 그 소식이 텔레비전 뉴스로 전해졌고, 여동생은 그 비극적 장면을 모두 보았었다.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 자신이 느꼈던 것을 파하로 엮어냈던 것 같다.

어쨌든, 한 사람의 인생, 과거와 미래, 감정, 계획 그리고 경험은 파하에 기호를 통해 기록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는 문화는 그 시대의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며, 더 이상 그 시대를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많은 문화와 관습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그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라고 말한다. 그들이 축하하는 방식, 그들의 옷,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들의 과거가 존재하는 곳은 박물관이나 전통옷으로 꾸며진 인형들이다. 하지만, 타킬레에서는 아니다. 문화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타킬레는 살아있는 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파하 역시 살아있다, 그것은 몸과 같다. 심장이 있고, [그 심장은] 마치 팔처럼 파하를 뒤에서 안전하게 지켜준다. 판매용이 아닌 흰색 줄무늬의 언더벨트가 있는 파하는 힘겨운 농사일을 하는 동안 그것을 찬 사람의 등을 받쳐준다.  그런가 하면 [파하는] 땋은 머리카락 같은 것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살아있다. 실제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뜨개질을 하거나 직물을 짜는 사람은 자신의 직물을 자를 수 없고, 그것은 죄악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쉽게 직물을 자를 수 없다. 이제 추요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어렸을 때 뜨개질 하는 할아버지를 지켜보곤 했는데, 나는 거기에 정말 빠져들었다. [할아버지가 짠 추요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나도 추요를 짜고 싶었다. 내가 놀고 있을 때, 할아버지는 어느 틈엔가 실[과 같은] 모든 뜨개질 재료를 꺼내 놓고서 ‘뜨개질을 해보련?’하고 말하셨고, 나는 ‘네. 뜨개질을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음, 할아버지가 나에게 막 실을 주려던 참이었는데, 할머니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나한테 나가서 양떼를 돌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뜨개질인데 왜 양떼를 먼저 돌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는 어쨌든 밭으로 나가 양들과 함께 뛰어 놀았다. 그것 역시 매우 재미있었다. 양들과 같이 호수로 내려가서 목초지를 찾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그래도 뜨개질을 하고 싶었다. 어쨌든 몇 년이 지나서, 아니 몇 달 혹은 몇 년이 흘러 처음으로 어린 양이 태어나는 것과 양털이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양털을 깎을 준비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양털을 깎으며, ‘그래, 너도 이제 너만의 실을 만들어야 한단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나는 아뿌스칸 apuscan, 물레가락을 꿰어 보았다. 그것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신념이나 할아버지의 믿음이 작용하는 방식으로 나만의 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 말은, 그것은 나를 치료해준 약이었다.[그만큼] 나는 정말 [나의] 실을 만들고 싶었었다. [마침내] 나는 나의 실을 만들었다. 내가 막 실만들기를 마쳤을 때, 할아버지는 바늘을 준비하고 있었고, ‘자, 이제 뜨개질을 해보자’라고 하셨다. 하얀색으로만, 양처럼 흰색으로만, 그때 나는 작은 새들과 상징들을 넣어가며 뜨개질을 하고 싶었지만, 먼저 완전히 하얀 모자를 완성해야 했다. 지루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뜨개질하는 것은 인내심, 즉 양털에서부터 모자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충분한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그 일을 해내었다, 무지의 흰 추요를 완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형편없었다. 모양도 별로였다. 내가 추요를 완성했을 때, 할아버지는 빨강, 파랑, 초록, 노랑 실을 꺼내셨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실을 바로 앞에 꺼내놓으셨다. [그리고는]‘이제 너만의 추요을 만들 수 있단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시작하였다. 우선 나는 그 색깔 조합 좋아하지 않았다. 나만의 조합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추요을 완성하고 나서 알게된 것은 나이든 형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놀릴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나는 [나의 추요에 사용한] 색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사용한 색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왜냐하면 내가 노란색과 초록색 혹은 [노란색과] 파란색을 조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색깔은 언제나 이곳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색깔이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색 코드를 어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색깔들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만약 내가 파란색 대신 검은색을 사용했다면, 그리고 빨간색 대신 더 어두운 색을 사용했다면, 사람들은 ‘왜 추요가 이런 색인지, 어두운 색인지 너는 아니?’라고 물어볼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두운 색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란색은 너무 많이 반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색을 보고] 당신은 홀아비인가요? 어디에서 왔나요? 아마 다른 행성에서 온 거 아니예요? 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요는 색상 코드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모두 똑같이 보이지만, 타킬레 사람들은[4]Taquileño는 직물을 보면 바로 알아차린다. 만약 당신이 나의 추요를 쓰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며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당신에게 후안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뜨개질이나 직물로 서로를 알아 본다. 육안으로는 모두 똑같아 보이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색이다. 어떤 가정에서는, 함께 모여 살기로 할 때 커플이 직물을 짜는 기술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때로 소녀의 아버지가 추요가 만들어진 상태를 확인하기도 한다. 추요는 튼튼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튼튼해야 하고, 촘촘히 짜여져야 한다. [그래서] 또 어떤 가정에서는 [추요에] 물을 붓는 경우도 있다. 거의 온 가족이 그 젊은 남자가 추요를 잘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방수가 되게 짰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 물이 여전히 추요 안에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 안에서 역할을 시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남서 해안 프랑스는 헥타르당 한 마리의 양을 키울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황폐한 습지였다. 양치기들은 그들의 양들이 먹을 더 좋은 풀을 찾으러 매일 긴 거리를 이동하고, 발을 건조하게 하기 위해 죽마를 사용했다. 그들은 쉬고 싶을 때면 막대기를 사용하여 삼각대를 만들었다. 3미터 상공에 자리잡고 털실로 옷을 짜면서 양떼들을 찾기 위해 지평선을 살폈다. 멀리서 양치기들을 본 사람들은 그들을 작은 뾰족탑과 거대한 거미에 비유했다.

2000년 당시 인구가 1900명으로 추산된 타킬레 섬은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작은 섬으로, 해발 13,000피트(3,815m)에 있는 안데스 알티플라노(고원)의 안디안스 알티카카(고원)에 있는 섬이다. 케추아어Quechua를 사용하는 이 지역의 주민들은 드라마틱한 색감의 정교한 직물과 지역사회가 통제하는 관광의 모델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2005년 유네스코는 타킬레와 그 직물 예술을 구전 유산과 무형 유산의 걸작으로 인정하였다.

[1] 티티카카 호는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호수이다. 운송로로 이용 가능한 호수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이다. 또한 남아메리카에서 수량이 가장 큰 호수이기도 하다. 

[2] 타킬레은 티티카카 호수의 페루쪽에 위치한 섬으로 푸노시에서 45km 떨어져 있습니다. 섬에는 약 2,200 명이 살고 있는데, 크기는 5.5 x 1.6 킬로미터이고 면적은 5.72km²입니다.

[3] 챌린저 우주왕복선은 두 번째로 임무에 투입된 미국항공우주국의 우주왕복선이다. 이름은 마리아나 해구의 깊이를 최초로 측정한 영국 탐험선 HMS 챌린저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4] 타킬레 섬 출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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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볼리비아 티후아나쿠 Tihuanacu(Tiwanaku) 에서 열린 제2차 미국 조직 및 운동 회의 American Organisations and Movements 에서 아이마라 족(族) 군사지도자 바르톨리나 시사 바르가스 Bartolina Sisa Vargas 를 기리며 9월 5일이 공식적으로 국제 토착 여성의 날로 지정되었다.

1780년대 초 페루와 알토 페루(현 볼리비아)의 고지대에서 퀘추아 족과 아이마라 족 일당이 스페인 압제자들과 싸웠다. 바르톨리나 시사는 남편 투팍 카타리와 함께 1781년 라파스를 포위한 4만여 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토착민 봉기를 이끌었다. 시사는 184일 동안 유지되었던 포위 공격의 지휘관이었으며, 11개월 후 반란군이 진압되며 처형당했다. 초기부터 바르톨리나는 혁명의회에서 여성을 고려하게 하는 등 이 운동에 역동적인 공헌을 하였다. 민중 봉기는 오늘날 사회 운동의 목표, 토착권의 회복, 안데스 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들에 대한 공평한 재분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바르톨리나 시사는 말의 꼬리에 묶여 목에는 밧줄이 감기고, 벌거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감옥에서 나온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반란군 지휘관인 그녀의 시누이 그레고리아 아파자 Gregoria Apaza 는 당나귀에 얹혀 나온다. 그들 각자의 오른손에는 셉터 scepter 같은 지팡이 십자가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 가시관이 쓰여져 있다. 그들 앞에서 죄수들은 나뭇가지로 땅을 깨끗이 쓸고 있다. 바르톨리나와 그레고리아는 교수형이 행해지기 전까지 볼리비아 라파스의 주요 광장을 몇 바퀴씩 돌면서 그들을 인도 여왕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돌과 비웃음 속에 고통 받는다. 선고문에는 그들의 머리와 손이 지역의 도시들에서 [본보기로] 전시될 것이라고 쓰여 있다.

 

바르톨리나의 숙명fate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9월 5일은 그녀를 기억하기 위한 날일 뿐만 아니라 500년간의 탈식민화, 토지개혁, 사회정의 투쟁의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토착 여성들이 행했던 중요한indispensable 역할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날 볼리비아 농민 여성 바르톨리나 시사 전국 연맹 Bartolina Sisa National Federation of Bolivian Peasant Women (FNMCB-BS 또는 바르톨리나스 Bartolinas)은 힘있는 단체로 성장했다. 2010년 바르톨리나 지도자 닐다 코파 leader Nilda Copa 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 되었으며, 플뤼니얼 입법회 Plurinational Legislative Assembly 에는 여성대표자가 전체의 30%에 이르렀다. 더불어 전체 볼리비아 의회 의원 중 43%가 여성이다. 또한 현 정치 행정부는 여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예를 들어] 2006년과 2008년 사이에 정부는 농촌 여성들에게 10,300개의 부동산 소유권을 분배했다.

온두라스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서방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았던 2009년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 자신들의 토지를 보호하려 했던 마야인 12명과 31명의 노동조합원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된 바 있다. 이 쿠데타에는 섬유와 의류 분야에서 일하는 11만 명의 여성들이 참여했으며, 당시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미국의 ‘자유 무역’ 이자에 대항해 아메리카 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 Bolivarian Alternative for America 에 서명했던 마누엘 셀라야 Manuel Zelaya 정부에 맞선 쿠데타였다. 바르톨리나와는 달리 베르타 카세레스 Berta Cáceres 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토착민 출신의 환경주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사실이 2016년 그녀의 암살이나 2017년 딸의 목숨을 노리는 뻔뻔한 시도를 막지는 못했다. 정권의 테러 전략이나 노동자와 협상하기보다는 공장 문을 닫아버리는 섬유 기업들의 전략에도 불구하고 2015년과 2017년 캐나다 소유의 길단 Gildan 공장에서 9,000명의 여성들이 2년간의 투쟁 끝에 노조 결성권을 따냈다.



Llama Figure | 라마 피규어

울, 면, 식물섬유/ 추정 중후기/ 약 1000-1450 CE/ 찬 차이Chang Cay/ 출처 이베이, 2013. 오늘날까지 페루와 볼리비아 고원 원주민의 생존은 라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중요했을 뿐 아니라, 토착민들의 믿음의 체계에서 낙타류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사람들은 볼리비아 라마모(毛)가 스페인 양모보다 품질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십년에 걸쳐 식민지 이전 라마수의 10%만 남기고 몰살시켰다. 안데스의 양치기들은 무리에서 개별 동물들을 묘사할 수 있는 인구 분류법demotic taxonomy 을 개발했다. 이러한 계층적으로 무질서한 체계는 매우 유연하여 광범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물들은 수컷 혹은 암컷으로 구분될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생식이 가능한 동물은 생식이 불가능한 동물들과는 다른 성별을 가지는 것처럼, 다양한 젠더로 분류된다. 동물의 나이는 햇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방목된 목초의 질과 고도, 자손의 수, 질병, 치아의 상태, 양모의 질과 양, 동물이 짊어질 수 있는 운반량 등 다른 기타 영향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동물 이름의 첫 부분은 라마인지 알파카인지 나타낸다. 그 다음은 색상의 분포 또는 패턴의 종류를 나타내며, 성, 나이, 양모의 품질이 그 다음에 표시된다. 동물이 만약 서로 유사한 경우, 설명이 추가된다. 동물의 양모가 밝은 색상이 우세한 경우, 일반적으로 알카alqa라고 부른다. 알카는 그 다양성에 따라 53개의 용어와 네 개의 어두운 기본 색상을 조합으로 총 212개의 조합이 가능하다. 기본 색상은 19개의 다른 명도를 가지며, 4028개의 가능한 알카 품종이 있다. 성별이 참고로 추가된다면, 동물의 젠더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이기 때문에, 그 수는 3배가 되어 12,084개의 품종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여기에] 나이 요소가 추가되면, 양치기들은 동물을 식별할 수 있는 20,000개가 넘는 상세한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수컷 라마와 알파카는 들판 사이로 그리고 때로는 마을 사이를 오가며 짐을 운반한다. 알파카와 라마 가죽은 매트리스, 베개로, 양모는 의류, 운반용 직물, 담요, 밧줄 및 슬링sling으로 사용된다.

알파카 털은 흰색, 갈색, 회색, 검은 색의 자연스러운 색상이나 그것을 조합한 직물로 만들어지고, 실로 만들어지기 전에 염색되기도 한다. 4 년 이상 자란 알파카의 가슴털은 슬링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알파카 고기는 신선하게 조리되거나 소금에 절여서 차르키ch’arki[1]로 보존된다. 알파카의 각 부분은 소비되거나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알파카 피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준비된다. 힘줄은 현악기의 줄뿐만 아니라 바느질에도 사용되며 악기를 함께 묶는 데 사용된다. 간은 튀겨서, 폐는 야채와 고추와 함께 먹고, 머리는 육수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신들에게 바치는 주요 성분인 동물성 지방으로는 양초를 만든다. 뼈는 직조에 사용되는 빗 모양의 도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배설물은 들판을 비옥하게 하고 햇볕에 쬐면 요리용 연료 역할을 한다.

푸노Puno[2] 양치기들 사이에서 번개에 맞아 죽은 동물들은 인간을 매장하는 의식과 동일한 의식을 치르고, 8 일 후에 그들의 혼령이 떠날 때 또 다른 의식을 치른다.

[1] 차르키는 육류를 소금에 절여 말린 식품이다. 남아메리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휴대 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현대에 말린 육류를 지칭하는 ‘저키’라는 말은 ’차르키‘에서 유래했다. 차르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2] 페루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푸노 주의 주도이다.



Black 블랙

“‘저희가’” 라며, 완벽하진 않아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 나무들로 우리가 ‘배’라고 부르는 걸 만들겠습니다. 남는 목재로는 ‘종이’를 만드는 법을 보여드리죠. 이 ‘종이’위에는 (우리가 일단 출항을 하면) 어떻게 ‘쓰는’지 (불탄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보여드리죠. 만약 저희보다 더 잘 하신다면 저희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겠군요.”

 

근대 그리스에서 자나 깨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미망인의 그 ‘전통적인’ 드레스는 가부장제 사회 억압아래에서 금욕 중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애플Apple의 맥Mac 제품으로 대표하는 현대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말년에 공적 옷차림으로 검은색을 선택했다. 초기 사진에서는 그가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후 수도사와 같은 폴로 넥polo-neck 셔츠로 [복장이] 변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15세기 초반에 얀 반 에이크Jan van Eyke가 그린 룩카Lucca[1]지방 상인 지오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의 계보를 잇는다. 아르놀피니는 상인의 품위와 충성심의 상징인 검은 비버 모피 모자와 까만 모피 드레스, 검은 스타킹과 신발 차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의 전환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공존할 수도 있다. 동시대 세계의 잡스와 더불어 고딕하위문화 Gothic Sub-culture의 검은 옷, 화장과 창백한 얼굴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악마와의 이런 협업은 훨씬 전부터 있어왔고 이 문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낭만주의 속에서 굴절되었고 뱀파이어 장르 영화와 텔레비전 쇼에서 독특한 재 유행을 만들어냈다. 16세기에 여성이 악마 숭배로 구속되는 사례는 웃어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의 사형집행인은 주로 붉은색을 입었는데 옷장엔 까만 옷을 넣어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검은색은 긍정적인 색이었다. 나일Nile강에서 내려온 그 모든 검은빛 모래 진흙과 대지의 비옥함의 상징이며 죽은 이들이 내세(來世)로 향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색이었다. 그리스 세계에선 내세-저승에 대한 관념이 변하면서 검은색이 부정적인 의미를 띄게 되었다. 태양과 빛과 생동하는 감각 세계의 하늘이 없는 저승Hades[2]은 따분하고 어둡다. 기독교의 악마 개념도 사티로스satyr[3]의 도상학(圖像學,iconography)에서 비롯했으며 서기 1000년 전후의 악마나 악(惡)에 대한 개념 역시 그 관념에 검은색을 더했다. 하지만 200년 후 검은색은  “도시 귀족들과 시 공무원 혹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옷을 선택하는 색깔로, 품위와 절개를 상징하게 되었다. 14세기 중반에는 염색 기술의 발달이 진행중이었고 염색업자들은 검은 피부의 성 마우리시오Saint Maurice[4]의 인기를 얻었고 염색업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변했다. “염색업자들은 모리스 성인을 자랑스러워 했고, 회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행진 퍼포먼스로 성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또한 예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린 예수가 티베리아스Tiberias지방 염색소의 견습생이 되어 색깔들을 만드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였다.

매염제(媒染劑)에 더 많이 의지하여 발전된 기술은 좀 더 제대로  된 검은색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기술과 더불어 귀족을 제외한 모두에겐 특정 색상 옷을 금지하는 사치 금지령은 1360-1380년대 사이의 상인들과 금융계 남성들이 검은색 옷을 입게 하는데 공헌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모습에 필요한 엄격함을 부여해서, 색공포증chromophobia과 신뢰감을 주는 금욕적 모습을 추구하는 개신교 인들의 심미적 방식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게 했을 것이다.

검은색은 수 세기 동안 그런 근엄함을 표현하는 색으로서 회색과 경쟁하고 있었다. 문명인은 “비문명적인 국가와 아이들”이 입는 밝은 색상을 싫어하며, 그 대신 남성은 검은색 여성은 하얀색을 입는다고 괴테는 말한다. 비판적인 형용사‘야한garish’은 밝게 염색된 옷이 음탕한vulgar 것이라는 개념을 영구화 했다. 17세기 브라질 사람들은 정반대로 이런 이야기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조적인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에게 영국식 옷은 “너무 음울한 옷 같습니다. 이런 우울한 옷은 싫습니다. 여기에는 퀘이커교Quakers[5]교인들도 없어요. 11월의 영국에나 어울릴 침울한 색깔들은 원치 않습니다”[고 말했다.]
때로는 이러한 경향이 미신적이라 여겨질 수 있다. 개신교도 자본가 헨리 포드Henry Ford[6]가 그의 고객들에게 “검은색이기만 하다면” 어떤 색의 차든 가질 수 있다고 했듯이, 혹은 영국 판사들이 사형 선고를 내릴 때처럼 참혹한 의식들의 대표자가 자신의 가발 위에 작은 검은색 모자를 얹은 것과 같이, 창조적인  전문 계급과 그 지식인들의 시대는 물론 스티브 잡스가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인 이 시대엔 검은색이 ‘쿨하다cool’는 개념과 함께 새로운 방식의 사제직을 선택하는 색으로 변모하며 생명력을 대여받았다. 이런 진지한 사람들은 예술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만, 분명하고 꾸밈없으며 정갈한 사람이기도 하다.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블랙을 더러움과는 거리가 먼 색이라고 여겼듯 검은색은 선명하며 명쾌하다. 최근 발명된, 반타 블랙Vanta Black으로 불리는 가장 검은 검은색은 거의 아무 빛도 반사하지 않는 색인데 스텔스stealth [7]위성에 사용되는 것으로 특허를 받았다. 현재 방위 산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있는 혁신들도 이 예를 따르고 있다. 나노 시스템Nany Systems 제작자들은 색채 효과로 저명한 영국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에게 이 색의 사용 독점권을 제공하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계약을 맺었다. 검은색의 부상은 수퍼 쿨super-cool하다.

[1] 룩카Lucca : 이탈리아 서북부, 플로렌스 지방 서쪽.

[2] 하데스Hades: 그리스신화에서 죽은 자들의 신이다. 여기에선 죽은 자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3]사티로스satyr;satyros: 그리스신화 속 반인반수 숲의 정령이며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호색가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들 사이에 진행되는 익살스러운 사티로스극satyros play은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

[4] 성 마우리시오Saint Maurice: 성 마우리티우스, 성 모리스로도 불린다. 로마 출신 군인이었으며 우상숭배를 거부하여 처형당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오토1세가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셨으며, 독일계 상인 조합인 검은머리길드(The brotherhood of bleackheads; Bruderschaft der Schwarzhäupter)의 수호성인이다.

[5] 퀘이커Quakers: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6] 헨리 포드 Henry Ford(1863,7,30~1947,4,7): 미국의 자동차 포드Ford 사의 창설자.

[7] 스텔스Stealth: 항공기나 유도탄 등을 제작할 때, 레이더 전파를 흡수하는 형상이나 자재 또는 도장(塗裝) 따위를 사용하는 기술로 항공기나 미사일이 적의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하는 군사과학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