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블랙

“‘저희가’” 라며, 완벽하진 않아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 나무들로 우리가 ‘배’라고 부르는 걸 만들겠습니다. 남는 목재로는 ‘종이’를 만드는 법을 보여드리죠. 이 ‘종이’위에는 (우리가 일단 출항을 하면) 어떻게 ‘쓰는’지 (불탄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보여드리죠. 만약 저희보다 더 잘 하신다면 저희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겠군요.”

 

근대 그리스에서 자나 깨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미망인의 그 ‘전통적인’ 드레스는 가부장제 사회 억압아래에서 금욕 중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애플Apple의 맥Mac 제품으로 대표하는 현대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말년에 공적 옷차림으로 검은색을 선택했다. 초기 사진에서는 그가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후 수도사와 같은 폴로 넥polo-neck 셔츠로 [복장이] 변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15세기 초반에 얀 반 에이크Jan van Eyke가 그린 룩카Lucca[1]지방 상인 지오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의 계보를 잇는다. 아르놀피니는 상인의 품위와 충성심의 상징인 검은 비버 모피 모자와 까만 모피 드레스, 검은 스타킹과 신발 차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의 전환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공존할 수도 있다. 동시대 세계의 잡스와 더불어 고딕하위문화 Gothic Sub-culture의 검은 옷, 화장과 창백한 얼굴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악마와의 이런 협업은 훨씬 전부터 있어왔고 이 문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낭만주의 속에서 굴절되었고 뱀파이어 장르 영화와 텔레비전 쇼에서 독특한 재 유행을 만들어냈다. 16세기에 여성이 악마 숭배로 구속되는 사례는 웃어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의 사형집행인은 주로 붉은색을 입었는데 옷장엔 까만 옷을 넣어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검은색은 긍정적인 색이었다. 나일Nile강에서 내려온 그 모든 검은빛 모래 진흙과 대지의 비옥함의 상징이며 죽은 이들이 내세(來世)로 향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색이었다. 그리스 세계에선 내세-저승에 대한 관념이 변하면서 검은색이 부정적인 의미를 띄게 되었다. 태양과 빛과 생동하는 감각 세계의 하늘이 없는 저승Hades[2]은 따분하고 어둡다. 기독교의 악마 개념도 사티로스satyr[3]의 도상학(圖像學,iconography)에서 비롯했으며 서기 1000년 전후의 악마나 악(惡)에 대한 개념 역시 그 관념에 검은색을 더했다. 하지만 200년 후 검은색은  “도시 귀족들과 시 공무원 혹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옷을 선택하는 색깔로, 품위와 절개를 상징하게 되었다. 14세기 중반에는 염색 기술의 발달이 진행중이었고 염색업자들은 검은 피부의 성 마우리시오Saint Maurice[4]의 인기를 얻었고 염색업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변했다. “염색업자들은 모리스 성인을 자랑스러워 했고, 회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행진 퍼포먼스로 성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또한 예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린 예수가 티베리아스Tiberias지방 염색소의 견습생이 되어 색깔들을 만드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였다.

매염제(媒染劑)에 더 많이 의지하여 발전된 기술은 좀 더 제대로  된 검은색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기술과 더불어 귀족을 제외한 모두에겐 특정 색상 옷을 금지하는 사치 금지령은 1360-1380년대 사이의 상인들과 금융계 남성들이 검은색 옷을 입게 하는데 공헌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모습에 필요한 엄격함을 부여해서, 색공포증chromophobia과 신뢰감을 주는 금욕적 모습을 추구하는 개신교 인들의 심미적 방식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게 했을 것이다.

검은색은 수 세기 동안 그런 근엄함을 표현하는 색으로서 회색과 경쟁하고 있었다. 문명인은 “비문명적인 국가와 아이들”이 입는 밝은 색상을 싫어하며, 그 대신 남성은 검은색 여성은 하얀색을 입는다고 괴테는 말한다. 비판적인 형용사‘야한garish’은 밝게 염색된 옷이 음탕한vulgar 것이라는 개념을 영구화 했다. 17세기 브라질 사람들은 정반대로 이런 이야기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조적인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에게 영국식 옷은 “너무 음울한 옷 같습니다. 이런 우울한 옷은 싫습니다. 여기에는 퀘이커교Quakers[5]교인들도 없어요. 11월의 영국에나 어울릴 침울한 색깔들은 원치 않습니다”[고 말했다.]
때로는 이러한 경향이 미신적이라 여겨질 수 있다. 개신교도 자본가 헨리 포드Henry Ford[6]가 그의 고객들에게 “검은색이기만 하다면” 어떤 색의 차든 가질 수 있다고 했듯이, 혹은 영국 판사들이 사형 선고를 내릴 때처럼 참혹한 의식들의 대표자가 자신의 가발 위에 작은 검은색 모자를 얹은 것과 같이, 창조적인  전문 계급과 그 지식인들의 시대는 물론 스티브 잡스가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인 이 시대엔 검은색이 ‘쿨하다cool’는 개념과 함께 새로운 방식의 사제직을 선택하는 색으로 변모하며 생명력을 대여받았다. 이런 진지한 사람들은 예술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만, 분명하고 꾸밈없으며 정갈한 사람이기도 하다.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블랙을 더러움과는 거리가 먼 색이라고 여겼듯 검은색은 선명하며 명쾌하다. 최근 발명된, 반타 블랙Vanta Black으로 불리는 가장 검은 검은색은 거의 아무 빛도 반사하지 않는 색인데 스텔스stealth [7]위성에 사용되는 것으로 특허를 받았다. 현재 방위 산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있는 혁신들도 이 예를 따르고 있다. 나노 시스템Nany Systems 제작자들은 색채 효과로 저명한 영국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에게 이 색의 사용 독점권을 제공하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계약을 맺었다. 검은색의 부상은 수퍼 쿨super-cool하다.

[1] 룩카Lucca : 이탈리아 서북부, 플로렌스 지방 서쪽.

[2] 하데스Hades: 그리스신화에서 죽은 자들의 신이다. 여기에선 죽은 자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3]사티로스satyr;satyros: 그리스신화 속 반인반수 숲의 정령이며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호색가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들 사이에 진행되는 익살스러운 사티로스극satyros play은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

[4] 성 마우리시오Saint Maurice: 성 마우리티우스, 성 모리스로도 불린다. 로마 출신 군인이었으며 우상숭배를 거부하여 처형당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오토1세가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셨으며, 독일계 상인 조합인 검은머리길드(The brotherhood of bleackheads; Bruderschaft der Schwarzhäupter)의 수호성인이다.

[5] 퀘이커Quakers: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6] 헨리 포드 Henry Ford(1863,7,30~1947,4,7): 미국의 자동차 포드Ford 사의 창설자.

[7] 스텔스Stealth: 항공기나 유도탄 등을 제작할 때, 레이더 전파를 흡수하는 형상이나 자재 또는 도장(塗裝) 따위를 사용하는 기술로 항공기나 미사일이 적의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하는 군사과학기술이다.

 Black                                                       37

오늘날까지 페루와 볼리비아 고원 원주민의 생존은 라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중요했을 뿐 아니라, 토착민들의 믿음의 체계에서 낙타류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16세기 스페인사람들은 볼리비아 라마모(毛)가 스페인 양모보다 품질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십년에 걸쳐 식민지 이전 라마수의 10%만 남기고 몰살시켰다. 안데스의 양치기들은 무리에서 개별 동물들을 묘사할 수 있는 종(種)분류법demotic taxonomy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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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of refinement, Goethe says, disliked bright colours, which were for “uncivilized nations and children”, instead wearing black for men. Despite some times being portrayed as devilish, it now signifies the cool self-discipline of the wearer.

괴테가 말하기를, 교양있는 사람들은 “비문명적인 국가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밝은 색상을 싫어하며, 대신 남성들은 검은색 옷을 입는다고 했다. 한 때는 검은 옷을 입는 것이 악마적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지금은  냉철한 자기 수양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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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ptember 5th was designated 1983 in Bolivia as International Indigenous Women’s Day in honour of Aymarán military leader Bartolina Sisa Vargas and of the indispensable role played by generations of indigenous women in the 500-year struggle for decolonisation.

1983년 볼리비아에서는 9월 5일을 국제토착여성의날 International Indigenous Women’s Day 로 지정하여 아얄라 Aymarán 군 지도자 바르톨리나 시사 바르가스 Bartolina Sisa Vargas 에게 경의를 표하고, 500년간의 탈식민화 투쟁에서 토착 여성들이 했던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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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understand is that culture belongs to the person who lives it. It doesn’t belong to he who stopped living. I see that there are many cultures, or many customs, that have disappeared, but, nevertheless, they say, it is ours but they don’t live it anymore. They’ve changed their ways of celebrating, their clothing, everything has changed. And where they have their past, they only have a museum, a doll dressed up, that is like that. But not in Taquile, it is still alive, it is walking. Well, Taquile in this case would be like a living museum.

내가 이해하는 바로 문화는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속하며, 문화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은 문화와 관습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라진] 문화나 관습이 자신들의 것이라 말한다. 그들이 축하하는 방식, 옷, 모든 것이 바뀌었다. 유일하게 그들의 과거가 존재하는 곳은 박물관이나 전통 옷을 입은 인형들에서다.  그러나 타킬레Taquile에서는 문화가 여전히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다. 타킬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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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 카네도 파티뇨 | Beatriz Canedo Patiño

이 직물은 인도네시아의 자티왕이Jatiwangi 주변 지역에서 여성 협동조합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제조되는 기와를 보여준다. 여성들은 정밀한 작업을 함으로써 남성들보다 더 수입이 많으며, 모두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점토의 채굴은 벼농사와 함께 진행된다. 바틱batik[1]은 이 지역의 전통 공예품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모두가 그 천을 입고 있다.

“나는 볼리비아인입니다. 그러나 수 년간 뉴욕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뉴욕은 그 물동량(物動量) 때문에 파리나 밀라노를 제치고 세계 패션의 중심지가 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볼리비아에서 회사를 운영 중인데, 나는 디자인을 하면서 다른 재봉사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든 옷들이 ‘메이드 인 볼리비아 Made in Bolivia ’라벨로 나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귀향은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기자가 “라파스에서 이런 멋진 여자가 뭘 하고 있을까”와 비슷한 제목으로 나를 인터뷰했던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왜 뉴욕을 두고?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의 핵심은 경쟁력 있는 가격입니다. 나는 MBA를 취득한 사람이 아니라 디자이너이지만, 토론토에서 500벌의 의류 주문을 받았을 때 자리에 앉아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곳의 재봉사들은 정규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정교한 작업을 하는데 문제는 없었습니다.  우스운 것은 이런 훌륭한 재단의 전통이 영국인들이 철도를 건설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때 몇몇 영국인 재봉사들이 함께 들어왔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이 일과 잘 맞는 이유는 내가 기술디자이너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이 때문에 아마도 나는 항상 미스터 카네도 Mr. Canedo라는 이름으로 우편물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단지 그들은 의류 사업 뒤에 여자라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내가 귀국했을 때, 우리의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 Evo Morales의 팀이 방문하였고 그들은 내가 그의 대통령 취임식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기를 원했습니다. 글쎄요, 그들은 분명히 내 명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내 말은,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많은 유명인들에게 옷을 입혀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가 알파카 실로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류층 볼리비아인들은 알파카를 입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에게 알파카는 하녀나 집사가 입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나에게 [대통령이 취임식에 입을] 옷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500년 만에 [선출된] 첫번째 원주민 대통령인 그가 정말 멋있게 보이길 바랬습니다. 비록, 진짜 볼리비아 스타일대로 그들이 매우 늦게 그 일을 넘겨줬기 때문에 나에게는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나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요구한 것은 대통령이 넥타이를 매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 점은 나와는 상관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대통령은 자신의 문화, 아이마라Aymará와 동일시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퀘추아Quechua사람이 아니라 아이마라 사람입니다. 나는 그 점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냥 손쉽게 아르마니 정장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고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출장으로 매우 바빴기때문에 부통령인 알바로 Álvaro가 와서 나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고, 나중에는  내가 만든 시안들을 보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정장이 알파카로 만들어질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국기가 빨강, 노랑, 초록색으로 충분히 요란스럽기 때문에 정장의 색깔은 은은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장에 아이마라의 문양들을 수놓기로 했습니다. 는 이 일에 매우 진지하게 임했고 이곳에 오거나 전화를 거는 이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취임식을 열흘 앞두고도 나는 그 문양들에 대한 모든 조사를 직접 다 했는데, 그게 내가 일 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까다롭다고 부르지만, 그게 그저 평범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내가 대통령을 위해 옷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언론에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전세계의 언론들이 대통령의 취임식옷을 만드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때로는] 모욕적인 태도도 보이며, 돈을 제안하고, 카메라를 가져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나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믿기 어렵게도, 그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밖에 있는 나무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물론 취임 후에는 더 이상 그들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지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나는 모든 낙타류 섬유에 대한 연구와 심포지엄과 더불어 그 주제의 국제 전문가들과 교류하고 있었으며, 그 섬유들을 내 디자인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초호화 섬유이자 가장 가는 섬유인 비쿠냐vicuña[2]는 캐시미어보다 훨씬 더 질이 좋고 게다가 훨씬 예쁜데, 캐시미어 염소가 아주 못생긴 것에 비해 비쿠냐는 매우 우아한 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비쿠냐를 처음으로 사용한 디자이너입니다. 나는 일부 말도 안되는 바보같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불구하고 비쿠냐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 말인 즉슨, 우리는 낙타과의 그 동물을 죽이지는 않으면서도 비쿠냐의 털은 깎을 수 있으며, 이는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농민들campesionos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 볼리비아에서는 비쿠냐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데, 칠레에서 열린 지난 심포지엄에서 나와 우리 회사만이 이를 디자인하고 제조할 수 있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것은 진지한 작업입니다. 이는 신성한 직물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우리가 진지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 말은, 최근 인터뷰를 하면서 오바마 부인에게 남편의 취임식 때 무엇을 입을지를 어떻게 조언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산타크루즈의 소위 수준 높은 신문은 나 외에도 몇몇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는데, 내가 한 말을 바탕으로 시안을 그렸고, 이에 나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이것은 나의 시안이 아닙니다. 머리는 너무 크게 그렸고, 물론 우리는 불쌍한 오바마 부인이 엉덩이가 크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날에는 이를 절대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방식! 내 말은, 코트의 길이는 드레스와 같아야 하는데, 그럼 그녀는 눈 속에서 지갑을 어떻게 들고 다닐 것입니까? 그녀는 얼어붙을 것이고, 게다가 알다시피 여왕과 공주들은 뒤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돈을 지불해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결코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화가 났지만 산타크루즈 언론과의 싸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인터뷰어는 상당히 멍청했습니다. 나는 오바마 부인이 세련되고 우아해 보여야 하기 때문에 스카프를 두르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보석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카라카스 Caracas[3]에서와 약간 비슷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피부, 피부, 피부; 보석, 보석, 보석 등 모든 것을 지나치게 과장합니다. 이에 첫 번째로 내가 말한 것은 “매우, 매우 작은 보석” 이었는데, 특히 지금 영부인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등장하는 것은 세계 경제 위기 상황에 비해 너무 화려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 바틱 batik: 인도네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염색의 독특한 기하학적인 무늬나 천의 명칭

[2] 비쿠냐vicuña: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평야 고지에서 서식하는 낙타과의 동물, 비쿠냐의 털은 캐시미어를 능가하는 최고급의 섬유이자 2-3년에 한 번씩만 털깎기가 가능한 희귀한 섬유이다.

[3] 카라카스 Caracas: 베네수엘라의 수도.



1972

노동조합trade union으로 설립된 인도의 자영업자 여성회(SEWA)는 917년 간디가 주도한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영감을 얻은 아나수야 사라바이Anasuya Sarabhai[1]라는 여성에 의해 1920년에 설립된 섬유 노동 조합에서 출발했다. 조합의 여성회는 1954년 제분소 노동자들의 아내와 딸을 연수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결성되었지만, 이것이 의류 생산의 전반적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착취를 당한 일부 자영업자 ‘가정주부’ 여성 재단사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노조를 촉진한 또 다른 그룹의 여성들은 거리에서 살면서 아마다바드[2]의 옷 시장에서 수레 끄는 일을 하는 이민 여성들이자 도매와 소매 시장 사이에 많은 옷을 나르는 ‘헤드 로더’[3]들이었다. 포목 도매상들을 무색하게 한 그들의 성공은 중고 의류 상인으로 일하는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자영업자들도 자체 노동조합을 가질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을 위해 투쟁하게 했으며, 마침내 그것이 인정되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섬유와 의류, 새 것과 중고품이 표준화된 금속 컨테이너를 타고 들어오고 나간다. 칸들라 Kandla[4]는 주요 중고품 환적 항구이다. 컨테이너에는 바다나 항구와 배 안에서 그들의 행방을 즉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RFID 태그가 붙어있다. 대다수의 항구에서는 사람의 도움 없이 컴퓨터 정보가 시키는 대로 작동하는 기중기들에 의해 [컨테이너가] 어디로 옮겨져야 하는지가 지시되고 조정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차례대로 도착하는 평평한 대형 화물차가 컨테이너를 들어 올리는 순서와 일치하도록 동기화된다. 오늘날의 로봇화 된 물류 시스템은 세계적인 생산 체인과 빠른 패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옷과 직물이 실제로 팔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울 동대문과 상파울루 시내와 같은 도매 소매 시장에서는 물류는 계속해서 손수레, 50cc 자전거 또는 자신의 어깨에 의지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라파스[5]에서는 인간 적재 운반선인 아파라피타스 aparapitas[6]가 시장 구역의 경계를 훨씬 넘어 운송한다. 이러한 경우 비록 공식적인 결합이 없더라도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는 관례에 근거한 임시 조합이 있다. [그러나] 스페인 령 세우타[7]와 멜리야[8]를 거쳐 모로코와 등지로 오가며 제도화된 ‘밀반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쟁세계에서는 그러한 임시조합이 없다. 이곳 여성들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촘촘한 복도같은 길을 다니며 최대 100kg에 달하는 짐을 나르고 있다. 한 여성이 다큐멘터리 제작진으로부터 당신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나에게 미래가 없을 때 어떻게 꿈을 가질 수 있느냐고 대답했다. 이런 맥락에서 SEWA의 존재와 수명은 특별한 것이다.

[1] 아나수야 사라바이(Anasuya Sarabhai)는 여성 노동 운동의 선구자이었고 1920 년에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섬유 노동자 연합을 설립했습니다. 

[2] 아마다바드(Ahmedabad)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351만 5,361명이다. 

[3] Head loader은 머리에 짐을 이고 나르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

[4] 칸들라(Kandla)는 Gandhidham시 근처의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Kutch District에있는 항구입니다. 쿠치 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안의 주요 항구 중 하나입니다.

[5] 라파즈La Paz는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이다. 1548년 에스파냐의 알론소 데 멘도사 선장이 건설했다.

[6] 아파라피타스(aparapita)는 볼리비아 시장에서 서로 다른 물품을 등에 업고 운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7] 세우타Seuta,Ceuta는 아프리카 모로코 북부, 지브롤터 해협 연안에 위치한 스페인의 고립 영토이자 자치 도시이다. 

[8] 멜리Mellia는 스페인의 자치 도시. 세우타와 마찬가지로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Jaket 자켓

아크릴 섬유 재질의 자수; 2009년 라파스에서 구입. 이 자수는 2009년 볼리비아 혁명 정부 시기에 판매되었다. 자켓에 수놓아져 있는,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Che Guevara[1] 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전세계의 의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산주의 영웅의 이 얼굴은 “노스탤지어의 상품화된 표현”이라고 불리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20세기 여러 독재 집권기 중 하나가 진행중이던 1987년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CIA(미국중앙정보부) 배후의 암살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거의 모든 암살사건에는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히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 196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사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억압과 대량학살, 고문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여기에는] 미국의 훈련과 다양한 지원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런 지점에서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2] 대통령의 당선은 혁신적이었으며, 모랄레스 정권이 2009년 2월에 설립한 새 국가 헌법 또한 그러했다. 대다수의 볼리비아 시민들이 한달이나 먼저 헌법 개정 총선거에 표를 행사했다. 새로운 헌법은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혁신적인 헌법이라 주장했고, 법령 전문(前文)에서 지난날 볼리비아 물 전쟁Water War[3]을 포함한 모든 고군분투와 과거 순교자들의 노력을 인정했다. 체 게바라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미지가 당시 급속도로 확산되었던 것은 대중이 체 게바라 역시 순교자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새 헌법은 볼리비아의 다민족적plurinational 성격과 생태계에 대한 책임 이 두가지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 법률, 경제, 문화와 언어의 다원주의를 선언하며, 헌법초안을 아이마라어, 케추아어와 스페인어로 작성함으로써 그것을 실현하였다. 그 외에도 국내에서 사용하는 다른 많은 언어들도 열거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나아가 “환경 시스템과 지역 거주민의 공동체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 인프라와 개발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서 자본주의 세계를 분노하게 하기도 했다.

[1]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6.14~1967.10.9: 본명Ernesto Guevara de la Serna.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정치가이자 혁명가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만나 쿠바 혁명Cuban Revolution에 가담했고 라틴아메리카 민중혁명을 위해 싸우다 볼리비아에서 사망하였다.

[2]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볼리비아의 전 대통령이다. 2005년 취임해 2019년까지 14년이라는 최장 집권 기록을 남겼으며 최초의 볼리비아 원주민(아이마라족)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다. 천연가스 등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해서 재정수입을 확충하고, 복지 정책을 시행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빈곤 해소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개헌을 하여 4선 연임을 시도하였고 2019년 11월 10일 부정선거 논란으로 시위가 일어나자 사임한 뒤 멕시코로 망명했다.

[3] 볼리비아 물전쟁Water War (Guerra del agua en cochabamba): 볼리비아는 1980년대 외환위기이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수도 민영화를 받아들였다. 미국의 건설 기업인 벡텔Bechtel이 지배하고 있는 기업 아구아스Aguas del Tunari가 상하수도 운영권을 갖게 되었고 코차밤바Cochabamba 시의 물 공급을 독점하며 물 값을 대폭 올렸으며 빗물, 농업용수사용에도 요금을 매겼다. 이에 2001년 시민들이 민영화 철폐를 주장하며 투쟁했고 4월 경 볼리비아 정부는 위 기업과의 계약을 폐기했다.



Linen 리넨

방적실은 15세기에서 17세기 후반까지 독일 마을에서 원사(原絲) 생산을 위한 중요한 중심지였다. 여성이 우위에 있다고 인식된 세계에서는 성적 문란과 무질서가 만연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무자비함과 용감함을 표현하기 위해 긴 기장의 리넨 셔츠를 입었다.” 원사와 그 원사로 짠 옷감인 리넨의 원 재료인 아마(亞麻)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직물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기원전 8000년의 아마 조각들이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수천 년 동안 [아마 생산은] 자급자족하는 ‘소작농’ 경제인 카우프 Kauf 라는 체제의 일부였는데, 카우프는 ‘새로운 세계 New World’의 노예들에게 입힐 옷을 만들기 위한 ‘오스나브뤼크 Osnabruck’ 천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만들어낸 노동의 분업과 함께 ‘반출 putting out’ 시스템인 페어라그 Verlag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 자율성을 훼손하고 철저한 자본주의 규율이 되기 위해 체계적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세계 최대의 리넨 생산국이 된 아일랜드 북부 지방 은 기술이 발전하고 공장체제로 전환하던 19세기 이전부터 변혁의 실험실과도 같았다. 16세기 말, 아일랜드를 방문한 한 영국 여행자는 원주민의 풍요로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일랜드 원주민들은 샤프란으로 염색한 30엘에서 40엘 길이의 셔츠를 입었다.”[1] 엘은 1야드[2]를 조금 넘었다. 18세기 중반까지 리처드 콕스 경 같은 ‘기업가적’ 식민지 지주들은 리넨을 사업화 하기 위해 사회 통제 시스템을 정교하게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토착인들의 달력이나 의례, 축일 등을 지키지 않게 되었고, 생산자를 위한 풍요 개념 역시 사라져 갔다. 하나의 예로 노동절은 ‘포상’의 날이 되어 공개적으로 보상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는 지역 주민들을 그들의 “일정하지 않은 기술수준”과 근면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노동인력actor로 만들었고,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 크게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부리는 술수machination도 경계해야 했다. 콕스는 그것이 “가게에서 쥐를 기르고 아끼는” 치즈장수와 같은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식민지적 사고방식은 평점제credit에 의해, 그리고 [평점을 받게 될] 잠정적 수혜자들이 아마나 린넨 생산을 위한“노동에 헌신”할 것이라는 생각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조각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영국이 식민지 의 토지를 횡령하자, 여전히 성장가능성이 있었음에도‘새로운 땅’의 감자 수입[4]때문에 더 의존적이게 된 아일랜드 농촌 인구가 만들어졌다. 1662년 토지 횡령은 협조적이지 않은 직공들의 아마와 직물 몰수, 잉글랜드에서 온 개신교 이민자들에게 주어지는 법적 특권, 아일랜드산 양모에 대한 큰 금액의 수출세 부과에 의한 양모 산업의 파멸, [그리고] 리넨에 대한 관세 보호에 의해 더욱 가속되었다. 이 모든 일은 그 유명한 위그노 망명자이자 아일랜드 리넨 산업을 창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리넨 전문가 루이 크롬멜린 Louis Crommelin이 도착하기 이전에 일어났다. 이 때부터 땅 없는 부랑자에 대한 복지(자비)는 해로운 것으로 묘사되고, 리넨을 생산할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악랄한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또한 여기에는 생산과 관련된 젠더 엔지니어링을 포함되었다.

방적은 병목현상처럼 보였다. 한 명의 방직공이 작업하기 위해서는 8명의 방적공이 필요했다. 리차드 콕스 경과 같은 초기자본주의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이  긴 섬유질을 파쇄하지 않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마 생산의 마지막 단계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작업을 하도록 했다. 남성들이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 “인위적인 나약함 artificial weakness을 배울” 필요는 없었다. 방적의 경우, 여성 노동력을 어디에서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는 쉽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홀란트에서는 혼자 있는 여성을 평온한 미덕의 전형으로 재현하는 반면 무리 지어 있는 여성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거칠게 표현하였다. 아일랜드에서는 가정에 있는 젊은 여성들을 ‘제멋대로’인 것으로 여겼고, 그들은 게을러서 ‘울타리에 구멍을 내고, 과수원에서 도둑질을 하거나 아버지를 거지로 만든다’고 여길 정도 정도였다. 반면에 이웃들이 빛과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한 장소에 모여 갖는 수작업 방적 ‘모임 bees’을 갖는 것은 큰 즐거움과 관련이 있었으며, 개신교와 카톨릭의 위계질서에서 볼 때 여성이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 다니는 것은 대단한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이상적인 해결책은 여성들이 성과를 내기 위해 분투했던 방적 기관에 있었다. 각 여성의 노동의 집약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소였던 작업장과 고아원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공간들은 공장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공장 규율을 적용하고 있었으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에서는 1811년에도  여전히 손으로 리넨 원사를 방적할 수 있었고, 아일랜드 북구에서는 [손으로 짠 리넨 원사가] 잉글랜드의 기계에 의해 생산된 똑 같은 재료들보다도 더 싸게 팔릴 수 있었다.

[1]  샤프론으로 염색된 아일랜드 셔츠

[2] 1야드는 0.9144 미터에 해당한다.

[3] Cox’s promotion scheme included an overhaul of the ritual calendar; he discourages his tenants from celebrating their traditional feast days and transformed May Day into “the joyous season of Determining the Premiums”(1749:32) Then, a full assembly gathered for the applauses and demerits that each deserved. In determining who got what, firsthand “Acquaintance” and “Observation” were essential, for it was cox’s view that the “Undertaker must attend personally the growth of the Undertaking” (1749:48) He should not “receive Reports from others; for those will often be partial, though Love, Malice, or Envy…”  from Cloth & Human Experience

[4] 새로운 땅. 감자도입

  Jaket 자켓                                         25 

자켓에 수놓아져 있는,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Che Guevara[1] 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전세계의 의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산주의 영웅의 이 얼굴은 “노스탤지어의 상품화된 표현”이라고 불리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20세기 여러 독재 집권기 중 하나가 진행중이던 1987년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CIA(미국중앙정보부) 배후의 암살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거의 모든 암살사건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히 미국의 배후를 받았다. 196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사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선 억압과 대량학살과 고문이 비일비재 했고 미국의 훈련과 다양한 지원이 연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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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esentations in Holland had the woman at home spinning as the epitome of tranquil virtue, whereas women in a group were too sensual and wild. In Ireland young women in the home were seen as ‘unruly’, their idleness leading to “tearing hedges, robbing orchards or beggaring their fathers”. 
English proto-capitalists instituted labour discipline.

홀란드에서는 혼자 있는 여성을 평온한 미덕의 전형으로 재현되는 반면 무리 지어 있는 여성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거칠게 표현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가정에 있는 젊은 여성들을 ‘제멋대로’라고 여겼고, 그들은 게을러서 “울타리에 구멍을 내고, 과수원에서 도둑질을 하거나 아버지를 거지로 만든다’는 이야기할 정도였다.
영국의 초기 자본주의자proto-capitalists 들은 노동기강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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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lf-Employed Women’s Association of India was founded as a trade union. It was kick-started by migrant women working as cart-pullers in Ahmedabad’s cloth market, who were then living on the streets, and ‘head-loaders’, women carrying loads of clothes between the wholesale and retail markets.

인도 자영업 여성 협회는 노동조합으로 설립되었다. 이를 촉진한 것은 길거리에 살면서 아마다바드의 옷 시장에서 수레 끄는 일을 하던 이주민 여성들이자 도매와 소매 시장 사이에 많은 옷을 나르는 ‘헤드 로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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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obviously they knew my reputation, I mean, I don’t want to brag but I’ve dressed a lot of famous people. Maybe also, they knew I’d done a lot of my work with alpaca yarn, even though Bolivians themselves, the upper class, so to speak, they wouldn’t wear it; for them it was for their maid or their butler to wear alpaca.

글쎄, 분명히 그들은 내 명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말은,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많은 유명인들에게 옷을 입혀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가 알파카 실로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류층 볼리비아인들은 알파카를 입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에게 알파카는 하녀나 집사가 입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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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Sheikh | 사이먼 셰이크

칼라스니코프 소총을 묘사한 아프간 양탄자.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레인에서 구입. 앤서니 다우니 박사의 소장품 제공

대상object과의 소통에 관해서: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체로 그것은 미적 대상이거나 문화적 가공물이며,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을 걸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아주 흥미롭고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만일 그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지 않거나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을 경우에 수용자인 나에게는 [그것이]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의미나 감정affect의 전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대상이 말을 건다고 전제하게 되는 언어는 그렇게 쉽게 식별되거나 분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목소리의 대행자나 저자가 있는 경우와 같이 의도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수수께끼의 중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대상이 주체의 응시gaze에 의해 활성화되는 경우인데, 이 때에는 소통이 가능하다. 둘째, 그러한 소통은 친숙하던 낯설던 간에 일종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독 및 번역이 가능하다.

우선, 먼저 의도하는 대상의 지위는 자연적이던 문화적이던 그것의 기원과 관련이 있으며, 후자인 문화적 대상의 경우에는 항상 재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재적인 사용 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은 다소간의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모양, 소리, 색깔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론 문화적 맥락과 판독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어느 정도 매력적이기도 하고, 불분명할 때도 있으며, 눈에 보이고 해독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상이 도드라져 보이게 하거나 배경에 묻혀 보이게 하는 시각적 외양appearance이나 정체성identity을 대상이 의도한다고 볼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는 어떤 대상이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단적인 믿음에서부터 기독교적 범신론을 넘어서는 종교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모더니즘의 난제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이러한 견해는 놀랍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을 문화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보편적인 추상언어라는 모더니즘적 전술은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우리가 이처럼 권위있는 방법authored policy의 변방에서, [다시 말해] 모더니즘적 사유의 가장자리에서 의도하는 대상에 대한 이론화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주변부에서 볼 때에만 전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모호한 텍스트가 바로 그 가장자리에서 동시대 저자들과 조응하게 되기 때문인 듯하다.

[여기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나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 같은 저자들이 주체subject에 대해서 언급한 글을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다른 접근법과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물의 언어라고 일컫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1]은 계획적인 제목이 붙은 『월드 스펙테이터World Spectators[2]이라는 저서에서 ‘사물의 언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물이 어떻게 소통하고 상대방의 시선을 원하는지를 상술하며, 의도하는 사물들과 곤충들에 대해 서술한 카이유와의 이론을 정확히 그려냈다. 벤야민은 사물 소통 개념에 대해 텍스트를 썼는데 이는 정확히 「사물의 언어The language of Things」라는 제목을 가진 히토 슈타이얼의 에세이를 통해 최근 다시 논의되었다.

실버만은 (명확하게 주제를 전달하는 제목인 『돌들의 글쓰기The writing of stones』[3]와 같은) 곤충과 바위에 관한 카이유와의 글을 읽었다. [그 글에서 카이유와는] 곤충과 바위는 아름다운 외양을 통해서 관심을 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미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경우에는 (인간)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사물에 의해서 촉발되는 욕망의 교환을 통해 소통하며, 형태, 모양, 윤곽, 색 등과 같은 사물의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미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라도, 소통은 의미적이지 않고 신체적corporeal이다. 반면, 벤야민의 글은 두 개의 실재를 상정하고 비교한다. 만일 두개의 언어, 사물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구분하고, 사물의 언어는 소리가 없는 것mute, 인간의 언어는 제도화된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는 것immersed이라 했다.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벤야민의 글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슈타이얼은 벤야민의 인간의 언어를 국가와 민족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 관행, 즉 담론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번역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결정적으로 슈타이얼에게 그러한 번역은 예술 활동 안에서 이미지의 아쌍블라주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하나의 구조적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의 번역이었다.

이러한 사물의 언어는 이네스 도우약의 별난 직물 컬렉션처럼 ‘원래original’ 형식form과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혹은 작가의 수정을 거친 번역된 아쌍블라주와 같이 제도적으로institutionally 조작되어 기술된 대상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는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경우, 볼리비아의 지도, 독수리 간판, 기관총이나 북미 인디언들이 쓰던 피스 파이프와 같은 이미지들을 해석하고, 직접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색채의 밝기나 직조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 사물을 사물로서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사물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1] 카자 실버만은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수사학과 영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전문 분야로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 있으며, 철학에 근거한 시각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2] 『월드 스펙테이터: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World Spectators』, 카자 실버만 지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옮김,예경,2010

책의 제목인 ‘월드 스펙테이터’는 저자인 실버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한나 아렌트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아렌트는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외부세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시각의 주체, 그리고 사회에서 책임, 의무, 권리를 지니는 주체를 철학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세계 관찰자’라는 말을 지어냈다.

[3] 암석의 형태와 무늬에 대한 카이유와의 논의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는, 대리석을 실제 예술작품인 것처럼 틀을 만들고 거기에 틀을 만든 사람의 서명을 새겼던 19세기 중국의 관습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예술가는 발견의 순간에 매우 강렬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진 대상의 의도를 주관화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언어」, 『월드 스펙테이터』,p.206)

카이유와는『돌들의 글쓰기』의 한 부분에서 암석의 무늬를 “특별한 기호들(의 집합)”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그는 글들을 “읽음”으로써 그들이 보이고자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창조물과 사물을 보는 방법을 배운다고 주장한다 (ibid.,pp.214-215)

 

1917

The Indian leader Mohandas Gandhi reads as he sits cross-legged on the floor next to a spinning wheel at home, photographed in 1946. # Margaret Bourke-White / The LIFE Picture Collection via Getty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의식적으로 서양과 인도의 다양한 복식을 체험했고, [이후]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차르카charka(물레)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도 거리낌없이 인정했듯 1915년에 인도로 돌아올 때까지 간디는 차르카를 본 적이 없었고, 인도에 도착해서도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손으로 방추를 이용해 실을 뽑는 기술이 거의 사라져가던 시기였던 1908년부터 간디는 실용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도구로 손으로 직접 직조 짜는 홈스펀homespun[1] 직조활동을 지지하고 있었다. 사실 간디는 [한때] 차르카하르가kharga(베틀)과 혼동하기도 했다. 이 활동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 상징을 사용하면 자칫 발생할 수 있을 위험에 대한 교훈을 보여줄 사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차르카 자체가 실용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도 발전될 수 있었기에 위험을 상쇄할 수 있었다. 수백 년 간 인도는 품질 좋은 면직물 생산국이자 세계적인 수출국이었다. [그런데] 영국산 면직물이 인도에 상당히 침투했고, [이에] 인도의 수출시장은 큰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집에서 직물을 짜는 일이 반식민주의 정치에서 중요한 운동이 된 것이나, 19세기 막바지에 “손으로 베를 짜는 행위가, 이젠 사라져가는 시골의 공예를 인도의 윤리적, 정신적 재생산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옷이] 단순히 지위를 말해주는 대부분의 사회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상징적인 힘이 옷에 깃들어 있으며, “개인의 윤리적, 물리적인 본질에 변화를 주고, 그 본질이나 영혼을 흡수하여 수년간 간직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벵골에서 일어난 스와데시 운동the Swadeshi movement [2]은 이러한 생각들을 종합하여 실현해 낸 정치 캠페인으로 영국산 물품 불매 운동을 이루어 낸 것이다. 공장 기계식 제작에 반하는 ‘홈스펀’의 미덕을 실질적으로 구현함으로써 더욱 실용적인 방식으로 앞서 나간 간디는, 계급에 관계없이 한번이라도 실을 잦아 직조해본 적이 있는 수많은 무직 여성들에 괌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출판한 『영 인디아Young India』에서 1820년대 한 미망인이 쓴 편지를 소개했다. 그녀는 세 딸을 키웠고, 자신의 딸들을 무시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방적공으로 일하며 받는 소득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남자들과 결혼시켰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벵골 지역 신문인 사마차 다판 Samachar Darpan에도 실렸었는데, 여기에서는 급격하게 달라진 그녀의 상황이 잘 드러난다. “앞으로 3년 동안 우린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방직공들은 이제 전처럼 실을 잦으러 집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실을 팔면 원가의 사분의 일도 되지 않는 값을 받습니다.” 그녀는 이 일이 벵골 서부 빌라티bilati 외국 실 때문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 방직공 여성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그녀는 외국실이 그렇게 싸다면 그 실을 만든 여성들도 그만큼 무척 가난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간디는 그의 동시대 여성들이 다시 한번 “노동 제작 공정에 투입되어 인도의 생산력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스크리트의 중요 법전일 뿐 아니라 기원전 200년과 기원 200년 사이에 기록된 현생과 내세의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옛 법전이었으며, 복장 규칙들을 포괄하는 힌두교 사회의 실용 윤리 규범을 담고 있는 다르마 샤스트라Dharma Shastra의 저자이자 동명의 문헌이기도 한 마누Manu[3] 속 전설적 인물을 언급하면서 “여성의 고전적인 위치를 재확인”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한 간디는 ‘케인즈 식Keynesian’의 수익창출과 고용의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4]가 지역적으로, 특히 여성들에게 적용될 거라 생각했다. 이러한 간디의 생각을 실현해낸 사람은 바로 ‘진취적인 미망인’ 강가벤 무즈무더Gangaben Mujmuder였다. 1917년 무즈무더는 바로다Baroda 지방의 비자푸Vijapur에서 물레들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그곳에 방직 센터를 세웠다. 그의 또 다른 추종자 마간할 간디Maganhal Gandhi는 물레의 바퀴를 기술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공장에서만 직물을 제작할 수 있었던 시대에 방직공들이 집에서 직접 직물을 짤 수 있도록 가르친 것은 바로 무즈무더가 찾은 한 무슬림 방직공이었다. 방직공들은 집에서 카디khadi(손으로 짠 인도 무명) 옷을 만들 수 있었고, 이는 자급자족의 상징이 되었다. 특정 민족주의나 가공되지 않은 옷에 의지하는 그들의 전통의 측면에서 본다면 산스크리트 법칙과 힌두교가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방직공들은 반드시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즈무더는 간디가 더이상 “짧고 거친 도티dhoti(인도 남자들이 몸에 두르는 천)를 입어야 하는 건” 아니도록, 훨씬 폭이 큰 카디khadi제작법을 고안한 사람이기도 했다. 카디로 만든 도티와 모자는 반식민주의를 표현하는 의상이었고 영국인들에게도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벤 람지Gangbehn Ramji라는 또 다른 여성은 카디 도티khadi dhotis 제작의 전문 교육자가 되었다. 반면에 간디는“물레에 대한 연구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우리는 수십 개의 물레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린 이제 기계적 제조법에 숙달한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며 본인이 갖고 있던 사상과는 상충되게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1] 홈스펀Homespun: 집에서 소박하게 손으로 짠. 또는 그렇게 만든 거친 모직물.

[2] 스와데시 운동 Swadeshi movement은 20세기 초 인도에서 반식민주의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국산품 애용 운동이다.

[3] 마누Manu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 <샤파타파 브라마나>를 비롯하여 서사시 <푸라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만물을 휩쓸어버린 대홍수가 지나간 뒤 마누만이 살아남았다고 전해지며, 최초의 법전인 <마누법전>의 창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4]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는, 경제 현상에서, 어떤 경제 요인의 변화가 다른 경제 요인의 변화를 유발하여 파급효과를 낳고 최종적으로는 처음의 몇 배 증가 또는 감소로 나타나는 총 효과를 말한다.

Indian Yellow | 인디언 옐로우

일부 힌두인들은 소의 소변이 건강에 좋다며 이를 마셨고, 그 중 몇몇은 암을 치료한다고 주장했다.

인디안 옐로우Indian Yellow는 19세기 유럽, 특히 영국의 화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다양한 피부 톤, 특히 컬러 차트의 끝의 어두운 색조”를 표현하는데 획기적인 성과를 보였다. 이 점에서 [인디안 엘로우는] 영국산 오커ochre나 인도나 극동산 수지로 만든 갬보지gamboge라 불리는 노란색 안료에 비해 뛰어났다. 이 안료는 회화에서 인종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특정 색조합을 사용해야 하며, 정형화된 얼굴을 표현해야 한다는 등 그들 스스로 ‘과학적’이라고 불렀던 다양한 인종차별주의에 맞물려 인기를 얻었다. 당시 영국의 미술 교사들이 ‘탁한dusky’과 ‘거무스름한swarthy’과 같은 색채 용어를 표준화하는 데 몰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이 바뀌면서 우선순위가 달라지게 되고, 이에 따라 팔레트에서 인디언 옐로우가 사라진다. 인디언 옐로우 혹은 퓨리purree는 주로 벵골지역에서 망고 잎 만을 먹인 소의 소변으로 생산되었다. 수익은 엄청났다.

캘커타에서 인디안 옐로우의 시장가격은 농부에게서 산 가격 보다 100~200배나 비싸게 팔렸다. 그러나 세기말 즈음, 일부 보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육된 소는 영양실조로 고통받으며, 일찍 폐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영국의 동물복지단체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영국은 1880년대 토착 힌두교 인도인의 소 보호단체들이 발전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창기 공동 계율 공식 발표는 그들이 꿈꾸는 커뮤니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성명서로 발전되었다.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어머니 소’에 대한 숭배는 그 뜻이 매우 모호했기 때문에 운동가들은 지역 정체성과 더 폭넓은 범위의 이데올로기적 운동의 가치를 연결 짓기에 용이했다. 성스러운 소의 이미지는 “…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통합하는데 사용될 수 있었고, 개혁주의자와 전통주의자의 목적에 기여할 수 있었으며, 시민들과 소작농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랜스다운 경 Sir. Landsdowne[1]은 “인도 반란Indian Mutiny[2]”이후로 이러한 흐름이 영국 정부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고 언급했다. 사실상 1860년 영국이 제정한 인도 형법Indian Penal Code에서 소는 신성한 대상이 아니었으며, 이 사항은 1888년 재검토되었다. 이념적 통합의 발전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명확한 법률도 제정하지 않은 채 인디언 옐로우를 금지하고 이를 선포했다. 요르다나 베일킨Jordanna Bailkin[3]이 분명히 밝힌 것처럼 이는 “식민지인들을 지배해야하는 임무와 그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그리려는 욕구가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된 경우”였다. 예를 들면, 불교 승려의 승복 염료로 사용된 겜보지는 인디안 옐로우의 대체물로 사용되었고, 캄보디아에서 생산되었으며,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걸치는 동안 무시무시한 평판 macabre reputation을 얻었다. [왜냐하면] 라디오랩 Radiolab[4]이 「퍼펙트 옐로우The Perfect Yellow」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겜보지에는 캄보디아 내전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알과 전쟁터의 진흙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1] 영국 정치가로, 5대 캐나다 총독, 전쟁 및 국무부장관, 외무부장관 등 영국 정부에서 여러보직을 맡았으며, 1888~1894년 인도의 총독을 지냈다.

[2] 세포이항쟁Sepoy Mutiny 또는 1 차 독립 전쟁First War of Independence이라고도하는 인도반란Indian Mutiny는 1857 ~ 59 년 인도의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널리 퍼졌지만 실패한 반란이다.

[3] 요르다나 베일킨Jordanna Bailkin은 워싱턴대학교의 국제학과 제레 L. 바카라크Jere L. Bacharach 석좌교수이다. 글로벌한 관점에서 근대 영국, 제국시대의 영국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탈식민지화, 비교 식민주의, 성의 역사, 아프리카 연구 등을 지속하고 있다. ‘Unsettled : Refugee Camps and the Making Multicultural British'(Oxford, 2018)의 저자로, 20세기 영국의 수 많은 난민 수용소의 벨기에, 유대인, 폴란드인, 헝가리안 등에 대해 저술했다.

[4] 라디오랩Radiolab은 2002년 설립되어 미지의 세계를 조사해오는데 전념해왔다. 라디오 호스트, 작곡가 및 프로듀서인자드 자드 아붐라드Jad Abumrad가 창립하고 자드와 TV 저널리스트이자 NPR의 과학 특파원인 로버트 크럴위치Robert Krulwich가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피버디상Peabody Awards, 내셔널 아카데미 커뮤니케이션 어워드National Academies Communication Award을 수상했다.

https://www.wnycstudios.org/podcasts/radiolab/segments/211193-perfect-yel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