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Aprons, 13 Photographs               6

크레타 섬의 풍요의 여신들과 아시리아 사제들은 신성한 앞치마를 입었고,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보석이 박힌 앞치마를 입어 그들의 지위를 보여주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상인과 장인들이 옷을 보호하기 위해 앞치마를 입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에이프런 맨’으로 불렸다. 에이프런 맨이 매우 흔해지자 몇몇 무역업자들은 그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스타일을 자랑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행동력에 관한 한, 안데스 사회는 여전히 패권적 유럽인들과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학이 만들어낸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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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elebrated Navajo weavers had trouble getting red yarn, despite their success with other dyes, especially black and yellow. They solved this by unravelling the red thread from commercial wool flannel used for Spanish army blankets, and then re-used it in their own weavings.

나바호족Navajo의 축복받은 방직공들은 멕시코의 스페인 군사들의 담요에서 실을 뽑듯 상업용 플란넬flannel 천인 바예타bayeta[1]천에서 붉은 실을 풀어내 다른 색실과 엮어 다시 짜고 방적기를 돌렸다.

[1] 바예타bayeta: 올이 촘촘하지 않고 느슨한 양모. 걸레를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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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teen Mecca schoolgirls trying to escape a fire at their school were forced back by members of the religious police because they were ‘not properly covered’, and were all killed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14명의 여학생들은 화재가 발생한 학교에서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몸을 제대로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경찰에 의해 학교에 억류되었고, 그들 모두는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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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ose strange animals – by now, I have unwrapped all and spread them out around me (a room full of aprons!) – from those strange animals, from those feathered birds emanates a story. (More likely, I am projecting onto the poor things, yet, clearly, a bond has been formed between us.) It is wrong to call them aprons, they answer to another name, old-fashioned, but much more apposite: “pinafore”.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 지금쯤이면, 나는 모든 포장을 풀고 앞치마들을 내 주위에 펼쳐 놓았다(방은 에이프런으로 가득 찼다!) – 그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그 흐트러진 새들로부터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나는 그 불쌍한 것들에 투영하고 있지만, 우리 사이에 분명히 유대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앞치마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구식’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훨씬 더 빈틈없는: “피나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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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Jorge Hinderer Cruz | 막스 요르게 힌더러 크루즈

역사상의 모든 이름. 큰/아름다운 눈을 가진 뼈라는 의미의 ‘차카 나이라Chaka Nayra’는 호기심으로써 리마Lima의 오래된 동네(구시가지)의 길거리 상인들의 담요에 다른 물건들과 나란히 펼쳐지는 것으로 끝나기 전에, 직조를 할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원이 불특정한 뼈로 만든 도구이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형태로 순환되어 그것은 이제 국가 성장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쯤, “내가 결국 역사의 모든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1]. 도구로써, ‘차카 나이라’는 주로 직조 빗의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목적은 기하학적인 축을 형성하여 연결된 십자형 실을 서로 팽팽하게 조여, 실에 의해 나타난 여러 방향으로 함께 밀어내 고밀도 평면으로 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차카 나이라’는 긴 천long weaves, 벨트, 밴드, 또는 세밀한 작업을 위한 아주 매우 가느다란 직조 뼈weaving bone이면서 가느다란 빗이다. 예를 들면, 값비싸고 거친 질감의 직조를 장식하거나 마무리하는 것이다.

가늘고 길쭉한 뼈(elongated bone)는 다양한 동물 모양의 판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일부는 물체 자체의 윤곽을 반영하여 추가 형상을 만들어 낸다. ‘차카 나이라’를 세로축 방향과 옆면으로 돌리면, 다른 하나의 형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거북이의 머리가 나타나는데, 라마나 악어, 또는 왜가리, 심지어 실제 같은 코끼리 머리도 있을 것이다. 이 도구에 생기를 불어넣는 야생동물들의 형상과 영혼은 동그랗고 하얗고 움푹 들어간 요소들과 눈처럼 우리를 쳐다보는 구멍들에 의해 생동감이 생기는 것이다. 몸은 하나의 조각과 길쭉한 뼈와 살구크기만한 골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손에 잘 맞으며 대략 11 센티미터의 길쭉하고 가늘게 튀어나온 손잡이 역할을 하는데, 우아하게 구부러진 목(혹은 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총 16센티미터 길이다. 이것은 양이나 라마의 움푹 들어간 뼈로 만들 수도 있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내어 광택을 낼 수도 있다. 또는, 약 두 살 정도 된 아이의 허벅지 뼈로 만들 수도 있다. 뼈의 물질은 콘도르(남미 대형 독수리)의 뼈로 보기엔 너무 무거워 보이고, 성인 가톨릭 성직자의 척골 뼈로 보기엔 너무 크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다른 직조 뼈로 만들어지거나, 특정 직물에 대한 특정 작업이나 장식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은 뼈의 크기, 기원, 밀도와 더불어 빗의 이빨 수 같은 특징에 따라 나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차카 나이라가 생물학적으로 누군가의 뼈의 형태로 한때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 또는 누구의 직물 형태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차카 나이라로 다양한 옷, 생필품, 유통품, 더 자세하게는 보형물, 도구, 정신적/형식적 구조를 표현한 민족지학적인 공예품들을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결국 차카 나이라는 객관성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간단히 말해, 차카 나이라는 항상 관계를 묘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끈끈한 유대감, 많은 다른 사람들, 그 사람들의 온기, 서로의 관계, 그리고 특정한 문화적인 물건들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의 도구로써 사용되어 우리에게 다시 완벽한 옷감과 도구들로 돌아와 우리를 보호해준다.

20세기와 21세기의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차카 나이라의 변화는 콜럼버스 이전의 생산과 생계 형태와 식민지 노동과 착취의 폭력 형태 사이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반대로, 모든 조산한 라마, 어린아이의 예상치 못한 죽음,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은 모두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들의 정당한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시도로, 우리는 그들을 다시 상기시키고 구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도구를 통해 그들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우리는 차카 나이라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의 축을 한 바퀴 돌린다면, 모든 역사 속의 이름들이 살아있을 때의 눈으로부터 우리에게 말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1] 여기서 우리는 라파스La Paz의 마녀 시장Witches Market에서 우리의 작은 손가락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손가락 인형은 즉시 우리의 직조골을 입히고, 그것을 두 배로 하고, 거울을 보고, 말을 하도록 도와준다. 역사의 이름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제공받았다. 1889년 1월 5일 스위스의 유명한 문화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니체는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겸허함을 꺾는 것은, 내가 결국 역사에서의 모든 이름이라는 점이다”라고 썼다. 역사가들은 니체의 마지막 편지를 Wahnbriefe (“미친 편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손가락 인형과 관련되듯이 차카 나이라라는 단어 조합은 이름처럼 듣기 좋으나 아이마라에서는 정확한 의미가 없다. 챠카 ’chaka’는 뼈라는 뜻이고, 나이라 ’nayra’는 눈 혹은 큰 눈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이라 ‘nayra’는 눈의 확장으로, 혹은 시선이나 멀리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차카 나이라 ‘chaka nayra’는 “큰/아름다운 눈을 가진 뼈” 혹은 “멀리 바라보는 뼈”로 번역될 수도 있다.



Poncho Huayruru

독일령 식민지 토고의 한 면화 수집소.

 미국 앨라배마주의 흑인학교인 터스키기 공립 학교를 졸업한 존 W. 로빈슨 John W. Robinson 은 독일이 식민지배하고 있던 토고에 목화 재배학교 및 실험 농장을 개설한다. 터스키기는 부커 T. 워싱턴 세력이 탄탄한 지지를 받는 지역으로, 그는 노예로 태어나 19-20세기 전환기의 미국 흑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895년 애틀랜타 연설에서 그는 인종차별적 짐 크로 법 Jim Crow laws을 감내하면서도 흑인의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또한 목화에 기반한 ‘새로운 남부 New South’의 미덕을 선언했는데, 이는 노예제를 대체한 소작제도 아래에 고도로 훈련된 노동력들 곧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채집 기술에 의존한 것이었다.

한편 아프리카 토고 남부에서는 이미 에우족Ewe이 자생적으로 목화를 재배하고 있었고 지역 시장에는 “매우 내구성이 강한 면직물”이 있었지만, 수출 사업으로 하기에는 섬유 가격이 너무 높았다. 오직 여성만이 목화를 재배하고, 솜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로 뽑아, 그 방적실을 남성인 직조공에게 팔았다. 일부일처제가 아닌 관계에서 이는 여성에게 독립적인 수입이 있음을 의미했다. 독일 식민주의자의 눈에는 여성 중심의 가정에 너무 큰 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정책협회Verein für Sozialpolitik 연구소의 인종주의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던 식민주의자들은 매우 초기부터 목화 농업의 이러한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했다. 다른 유럽인들이 그랬듯이 그들도 “대미(對美) 면화 문화투쟁 Kulturkampf”을 외치며 미국의 면섬유 독점을 와해시키고 싶어했다. 이는 중대 사업이었다. 1900년까지 독일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면화 생산국으로서 업계에 40만 명이 종사했지만, 원면(原綿) 가격의 빠른 상승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칼 헬페리치 Karl Helfferich 는 “유럽 면화 산업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식민지에서의 생산뿐 이라고 주장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시도한 대농장제는 결과적으로 임금 노동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과 그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발생시켰다. 토고에서는 [대농장제] 대신 명목상으로는 자유농부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세계 시장에 내놓을 면화를 생산하지만 만약 농부들이 생산하지 않을 시에는 생산을 강요하는 폭스쿨투어 Volkskultur[1]를 만들고자 했다. 경작 및 노동 규율에 있어서의 현대적인 방법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면화 생산에 기여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경작으로의 전환과 이에 필요한 육체적 힘은 여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식민-가부장적 꿈인 부르주아 가정상을 사회 규범화 하기 위한 초석을 놓을 것이었다. 

부커 T. 워싱턴이 “당신들은 우리가 남부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목화만 기르도록 가르친 그 실수 말이다.” 라고 경고했음에도, 독일 사회정책협회 멤버들은 터스키기 및 부커 T.워싱턴 주변 그룹과 맺은 연계를 통해서, 그 방면 전문가인 미국의 ‘니그로 Negro’가 토고 남부인들이 세계 면화 시장의 생산업자가 되기 위한 완벽한 롤 모델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독일인들은 터스키기 학교 졸업생들이 식민지 당국을 존중하며 씨앗과 전문지식을 가져와서 농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01년 네 명의 졸업생이 도착했고 여성들이 사용했던 괭이를 대신할 쟁기 역시 가져왔다. 사람들은 쟁기를 보고 열광했으나 쟁기를 끌게 한 여러 동물들이 모두 체체파리 때문에 죽었다. 그리하여 ‘전문가들’ 중 한 명인 캘로웨이 Calloway는 남자들이 동물 역할을 맡아 쟁기를 직접 끌게 했으며 이는 하나의 표본, 즉 식민적 진보의 잔인한 아이러니가 되었다. 면화의 수출이 증가하고 여성의 힘은 약해졌으나, 1904년이 되자 식민지 권력은 모범적인 ‘니그로 Negro’ 농부들의 방식을 버렸고 그 대신 앞서 말한 네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존 로빈슨 John Robinson이 노스테 Nosté에 토고 면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합리적 목화 농사를 가르치는 3년 과정이었으며 식민지의 모든 구역에서 학생들을 보내야 했다. 학생들은 ‘자유’ 농부가 되기 위해 그곳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터스키기 학교와 달리 식민 당국은 그들이 학업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다양한 비공식적인 저항 전략을 사용했는데, 식민지 개척자들에게는 타고난 ‘나태함’ 탓으로 치부당했고, 자국민들 사이에서는 위신을 잃었다. 이들이 위신을 잃는 것은 가부장적 가정 모델을 만들어 내고자 한 식민지적 목표를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독일의 감독을 받는 모범 농장 생활에 배우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외롭고 불쌍한 젊은이들”을 적잖게 배출했다. 초기부터 가격보증제, 터스키기 농가에 의해 개발된 전문종자, 철도 건설 등을 활용하여, 1909년까지 면화 수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다가 이후 차츰 감소했다. 로빈슨은 워싱턴이 처음부터 공언했던 방침에 의거하여, 목화는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 것이지만 “사람들이 오로지 목화만을 쫒아 살 수는 없다 … 그들은 목화와 얌을 더 잘 기르도록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식민지배 체제에서 열외의 처지에 놓였다. 사실 토고의 농부들은 언급될 필요조차 없다. 철도, 시장, (너무나 낮았던) 가격 보증은 재배자들이 자급자족 농사를 포기하고 단일재배 생산을 하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단일재배 생산은 더 노동 집약적이면서도 추가 보상은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의 영국 경우와 달리 독일 식민주의자들은 과세와 신용 거래의 착취적 시스템을 통해서 강제력을 제도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 시장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Feather | 깃털

머리부터 윗부리 끝까지 능선을 따라 아름다운 노란 줄무늬가 이어져 있다. 같은 너비의 더 진한 노란색 줄무늬는 얼굴에서 부리 끝까지 직각으로 떨어진다. 이어 그 절반 넓이의 검은 줄무늬는 능선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며 가장자리를 따라가다 부리 끝으로부터 반 인치 안쪽으로 좁아진다. 나머지 부분은 밝은 빨간색이다. 아랫부리에는 노란 선이 없으며 윗부리와 같은 모양으로 검은색과 빨간색이 펼쳐져 있다. 차이라면 끝에서부터 1인치 정도의 위치에 검은색이 있다는 것이다. 윗부리의 짙은 노란색 줄무늬와 맞닿는 줄무늬 부분은 하늘색이다. 이 부리가 가진 모든 찬란한 색깔들이 새의 몸체 깃털과 눈 주변 피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파란색을 제외한 모든 색상은 본래 갖고 태어났다. 파랗게 나타나는 부분은 실제로는 투명한 하얀색이며 그 내부의 파란색 엷은 피부 조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 뛰어난 부리는 죽음과 함께 색이 바래지고 삼사일 내로 고유의 색을 잃는다.

스페인 수도승은 잉카문명인들이 정글 위로 “새와 같이” 날 수 있다고 보고했으며, 스페인 종교계 권위자들은 날개로 짠 직물들의 샤머니즘적 능력을 크게 두려워하고 그들을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스페인인들은 쿠스코Cuzco인근의 잉카 군부대에서 10만 마리가 넘는 양의 말린 새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날개는 제복에 사용되기 위해 보관되어 있었으며 군사들은 그 날개로 봉급을 지급받았다.

깃털 예술 작품은 남미의 많은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식민지 이전pre-Columbian 페루와 현재의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보존되었다. 마야 초기부터 불운의 아즈텍 문명에까지 이르러, 귀족과 사제, 장군들은 그야말로 깃털들을 숭배했고 이들로 망토나 머리장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완장을 즐겨 꾸몄다. 목테쭈마Moctezuma황제는 이국적인 종種으로 이루어진 자기만의 사육장을 소유했는데 새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300명의 하인이 필요할 만큼 규모가 컸으며, 목테쭈마만을 위한 깃털 예술가 단체도 후원하고 유지했다. 식민지 이전의 셀 수 없이 많은 깃털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여덟 개뿐이며,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목테쭈마의 머리장식물로 알려진 작품이다. 길이 166cm에 넓이 177cm로 상당히 거대하며, 케트살Quetzal[1]의 녹색-금색 꼬리 깃털 장식 500개로 구성되었고, 흰색, 파란색과 붉은색 깃털 밴드와 작은 금색 로제트로 장식됐다.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éz[2]가 스페인 침략 중에 목테쭈마를 시해한 뒤 그의 왕관 (뻬나초 Penacho)은 스페인인이 압수했다. 왕관은 18세기에 티롤Tyrol에 위치한 암브라스 성Ambras Castle의 창고 상자에서 다시 발견됐고 비엔나 민족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성의 저장고에 있었던 1566년부터, 식민지 이전 남미였던 이 머리 장식의 기원은 잊혔고 “무어인의Moor-ish[3]모자”라 불렸다.

  1986년부터는 아즈텍 국가의 후손들과 멕시코 정부에서, 비록 이 장식이 목테쭈마의 소유였다거나 모든 날개들이 진품이라고 인증 받진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정부에 반환을 요청했다. 반환 요청의 진행 과정에서 비엔나 자연사 박물관 전 관장 올리버 파겟Oliver Paget은 오스트리아가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합법적인” 방식으로 대부분의 소장품을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위 장식의 복제품은 멕시코 혁명기의 국가상징으로 제작되었으며, 목테쭈마의 거처 유적 위에 건립된 멕시코시티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2011년부터는 이 왕관을 비엔나 인류학 박물관에서 일시적으로 대여해 오는 걸 고려 중에 있다. 아직 운송 문제, 의사소통 문제, 정치 법률적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협상은 현재 진행중이다. 파라과이의 아요레오Ayoreode[4]족장들이 패배하고 선교 사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피와 깃털들을 남기고 떠났다. 그들의 입을 권리와 자부심을 잃은 채.

[1] 케트살Quetzal: 중미 산의 꼬리가 긴 고운 새; 과테말라의 국조

[2]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éz: 1521년 오늘날의 멕시코인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였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첫 개척자 세대에 속한다.

[3] 무어족Moor; Moorish: 아프리카 북서부에 살았던 이슬람 종족. 8세기에 스페인을 점령했다.

[4] 아요레오족Ayoreode; Ayoreo: 파라과이 서부 아마존 강 유역의 토착 민족


Wichuna / Llama-Bone Pick Tool | 위추나/라마 뼈로 만든 직조 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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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쿠스코에서 수집, 개인 소장, 아카이브에 임대. 손가락 인형, 막스 요르게 힌더러 크루즈의 아카이브에서 임대.

직조를 위해서는 베틀을 뒤트는 방법과 백스트랩에 가해지는 압력을 조정하여 가장자리를 고르게 유지하는 등의 기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토착 미국인들의 직조방식은 유럽식의 플로어 베틀treadle loom과는 다르다. 미국인들의 직조의 경우 날실의 개수와 색상이 아주 신중하게 계산되어 디자인을 만드는데 이러한 기술은 나이든 여성들로부터 전수된다. 직조공은 디자인을 기억하기 위해서 라마뼈로 만든 위추나 집게 wichuna pick를 사용하여 날실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직조의 기본 구조 위에 유지되는 이 여분의 원사들은 표면을 가로질러 떠있고, 정밀한 기술이 요구되는 복잡한 공정에서 디자인이 완성된다. 직조공은 추가하거나 줄이기 위해서 원사를 집어 들어야 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하거나 혹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디자인 형식을 ‘볼’ 수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직조공은 간단한 장비를 사용하여 비교적 복잡한 패턴을 만들 수도 있으며, 디자인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직조는 직조과정에서 디자인이 양쪽면에 동시에 만들어지는지 혹은 단지 한쪽 면만 양호한 상태가 되도록 하는지에 따라서 ‘하나 혹은 두개의 면’을 갖는다. Through the reports of those who took it upon themselves to burn idols, we know a little about local belief systems starting around the early 17th century 우상을 불태워버린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서, 우리는 17세기 초에 시작된 지역의 믿음 체계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인 토착신앙에 대한 대규모 캠페인을 시작했다. 스페인사람들은 조상숭배를 금지했고, 와카huaca(신성한 신전)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조상을 모시는 신사에는 물레가락spindle, 집게 도구와 면 한줌과 같은 물건들이 있었다. 이런 도구들은 월식때면 숨겨져야 했다. 왜냐하면 여자로 여겨지는 달이 혜성에 의해 위협을 받으면, 물레가락이 독사로 변하고, 베틀은 곰과 호랑이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옷감은 (생명력)을 담는 그릇일 뿐 아니라 직조기구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힘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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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를 위해서는 베틀을 뒤트는 방법과 백스트랩에 가해지는 압력을 조정하여 가장자리를 고르게 유지하는 등의 기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토착 미국인들의 직조방식은 유럽식의 플로어 베틀treadle loom과는 다르다. 미국인들의 직조의 경우 날실의 개수와 색상이 아주 신중하게 계산되어 디자인을 만드는데 이러한 기술은 나이든 여성들로부터 전수된다. 직조공은 디자인을 기억하기 위해서 라마뼈로 만든 위추나 집게 wichuna pick를 사용하여 날실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직조의 기본 구조 위에 유지되는 이 여분의 원사들은 표면을 가로질러 떠있고, 정밀한 기술이 요구되는 복잡한 공정에서 디자인이 완성된다. 직조공은 추가하거나 줄이기 위해서 원사를 집어 들어야 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하거나 혹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디자인 형식을 ‘볼’ 수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직조공은 간단한 장비를 사용하여 비교적 복잡한 패턴을 만들 수도 있으며, 디자인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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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e-colonial Mexico the emperor Moctezuma had an aviary of exotic birds to garner feathers for cloaks and head-dresses which needed 300 attendants. The Spanish invaders in the Andean region were so worried at their use by Indigenous shamans that they banned them.

식민지 이전 멕시코의 목테쭈마Moctezuma 황제는 300여명의 참석자에게 필요한 망토와 머리장식용 깃털을 모으기 위해 이국적인 새들을 키우는 커다란 사육장을 가지고 있었다. 안데스 지역의 스페인 침략자들은 원주민 샤먼들이 이 깃털 장식을 이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이를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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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German-colonised Togo, there was call for a “cotton Kulturkampf” against the USA, and to this end freed black American slaves were brought in as role models. Their insistence on using the plough undermined women’s independence as cultivators.

독일 식민지 토고(Togo)에서는 미국에 대항하는 “면직 문화캠프cotton Multurkampf”에 대한 요구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 해방된 흑인 미국 노예들이 역할모델로 유입되었다. 그들은 쟁기 사용을 주장했고, 이는 경작자로서의 여성의 독립성을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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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 combination chaka nayra sounds nice as a name, but has no exact meaning in Aymará. Chaka means bone and nayra means eyes or big eyes. But nayra can also be understood as an extension of the eyes, or as gaze or gaze into the distance. Chaka nayra, then, could just as well be translated as “bone with the big/beautiful eyes” or “bony gaze into the distance”.

챠카 나이라chaka nayra라는 단어조합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아이마라어Aymara[1]에는 이에 해당하는 정확한 의미는 없다. 챠카chaka는 뼈라는 뜻이고, 나이라nayra는 눈 혹은 큰 눈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이라nayra는 눈의 확장으로, 혹은 시선이나 멀리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차카 나이라 chaka nayra는 “큰/아름다운 눈을 가진 뼈” 혹은 “멀리 바라보는 뼈”로 번역될 수도 있다.

[1] 아이마라어Aymara: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과 알티프 고원지역에 사는 아이마라 민족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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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ta / Carrier Cloth         19

안데스의 직조는 긴 역사동안 양면이 같은 직물을 창조해왔다. 양면을 가진 천cloth of two faces이라고 칭해지는 이 직물은 유럽에서 보기 드문 품질이었다. “이 전체에서 실 한오라기도 그 직물이 끝나는 점도 찾을 수 없도록 안데스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작업을 양면으로 제작했습니다.” (아코스타Acosta, 1590년,  4권 42부) [안데스인들은] 흠이나 얼룩 없이 잘 짜여진 직물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There was a time in the Renaissance when the cost of the colour was as crucial as the hue itself, costing “at least five good florins an ounce” according to one painter’s contract. By contrast, the 19th-century factory version of the colour has been compared to fast food.

르네상스 시대에는 [후원자와] 화가의 계약에 따라 “온스당 최소 5 플로린의 가격”을 지불하며, 안료의 비용이 안료의 색조 만큼  결정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세기의 공장에서 생산된 색상은 패스트푸드에 비유되어 왔다.

 Attacks on independent textile trade unions and their demands for a proper minimum wage in post-earthquake Haiti use the worldwide rationalisation that it would make their product ‘uncompetitive’.

독립적인 섬유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과 지진 후 아이티에서 적절한 최저 임금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아이티의 제품을 ‘경쟁력이 없게’ 만들 것이라는 국제적인 합리화를 이용한다.

While the beauty of the naked male ‘native’ Australian could not be reconciled with European notions of masculinity, their ‘lack’ of shame has to be met with disgust or ridicule. The ridicule was returned in full by Aboriginal women to the faces of fully dressed invaders.

벌거벗은 남성 호주 원주민의 아름다움은 유럽의 남성성에 대한 관념과 조화될 수 없었고, [나체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던 그들[원주민]은 혐오나 조롱에 직면해야 한다. 호주 원주민 여성들은 그 비웃음을 옷을 입은 침략자들의 면전에 그대로 되돌려줬다.

Fighting Glove                        9

팅구’Tinku’라 불리는 의식은 한때 안데스 세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고, 어쩌면 서기 1100년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것이다.2월 초 볼리비아 고원 사람들은 사카카 마을로 걸어간다. ( 산악 지대를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걸어 다니는 것) 주로, 자급자족 농민들이 춤을 추고 치차([그 지역에서] 호밀로 만든 발효 음료)를 마시고 피가 대지를 물들일 때까지(Stain) 서로 싸운다. 남자들이 거리에서 서로 맞서 싸우지만 때로는 여성들도 똑같이 싸운다. 일부 남성은 가죽 헬멧과 장갑을 착용하지만, 전투는 맨주먹으로도( 맨손으로) 할수 있다. 구경꾼들은 때때로 한쪽이 불공평한(경쟁이 안되는) 시합을 파하기 위해 끼어들기도 한다. 얼굴과 팔다리에 타박상을 입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도 발생 할 수 있다.

One of the first weaving innovations was that of passing the weft over two warp threads instead of one, which in Bronze Age Europe needed the invention of a loom with more than one heddle. In the same period, perhaps earlier, Peruvian weavers were using similar techniques. The distinctive twill pattern is of diagonal lines and diamond shapes.

최초의 직조 기술 중 하나는 한 가닥이 아닌 두 가닥의 워프 실을 넘기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에 유럽은 한 쪽 이상의 손잡이를 가진 베틀의 발명이 필요했다. 같은 시기에, 혹은 더 일찍이 페루 스웨터에도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독특한 트윌 패턴은 대각선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되어 있다.

Following 20 years of mass protests by Bangladeshi workers and the deaths of many of them in factory fires and collapses, they win a 76% increase in the minimum wage. This was opposed by the employers even though wages remain the lowest in a low-paid global industry.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20년간의 대규모 시위와 공장 화재와 붕괴로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한 후, 그들은 최저임금을 76% 인상받았다. 임금이 저임금 글로벌 산업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주들은 이를 반대했다.

I am beginning to understand what was never explained to me. I was only presented with incomplete facts. My family drew the cowl over me, but I am no nun. I wear a suit of armor, I am Catalina de Erauso. I killed one of them with this weapon. It was simple. He had not anticipated that I would come so close. His bloody breath clung to me as he was laid low. I do not know how many came before him. It is also of no consequence. Not to me. And they are used to making sacrifices. On this we agree.

나는 나에게 설명되지 않았던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불완전한 사실만을 전달받았다. 우리 가족은 나를 속였지만, 나는 수녀가 아니다. 나는 갑옷을 입은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이다. 난 이 무기로 그들 중 한 명을 죽였다. 그것은 간단했다. 그는 내가 이렇게 가까이 올 줄 몰랐었다. 그의 피비린내 나는 숨을 죽이고 누워 있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 왔는지 모른다. 그것은 또한 중요하지 않다. 나에겐 아냐. 그리고 그들은 희생을 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동의한다.

Ujutas, Ajotas / Sandals     26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샌들. 사슬을 매고 있는 누비아인과 아시리아 죄수들의 모습이 그러져 있다. 이집트의 오랜 숙적을 상징하는 8개의 아치 또한 그려져 있다. 이로써 그는 그의 적을 계속해서 짓밟을 수 있다. 18세기 브라질에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노예로 오인되지 않기 위해 도시 거리를 걸을 때 신발을 신었다. 일례로 노동권을 가졌는지 여부가 불분명했던 한 여성은 “신발을 신는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이유로 공무원에 의해 곤경을 모면할 수 있었다.

 “And off they sailed in a pea-green boat” “into the snot-green sea”, “dressed in goose-shit green”.

“그리고 그들은 완두같은 초록색pea-green 배를 탔다네” “콧물같은 초록색snot-green 바다 속으로” “거위 똥 같은 초록색goose-shit green 옷을 입고”

 

When, in desperation, Zoran Bulatovic, leader of the RASKA textile workers trade union, cut off his little finger with a hacksaw on live television in Novi Pazar, the Serbian media were quick to equate labour disputes with psychopathic acts.

RASKA 섬유노동자 노동조합의 대표인 조란 불란토비치가 절망에 가득차 노미 파자르 TV 생방송에서 줄톱으로 그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했을 때, 세르비아 언론은 재빠르게 노동쟁의를 정신병적 행위와 동일시했다.

The peasant weaver of exquisite hand-made baskets confounds the economic ‘law’ of economies of scale. He tells a businessman why it is that the more he produces, the more it will cost: if he or he and all his neighbours and family started production, no-one would any longer work his fields. “In such a case corn and beans would get so expensive that none of us could buy any and we would all starve to death.”

정교한 수제 바구니를 짜는 농민은 규모의 경제 ‘법칙’에 당혹한다. 그는 한 사업가에게 그가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이유를 말한다. 만일 그 혹은 그의 이웃과 가족이 바구니를 만들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분야에서 아무도 일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경우 우리 중 누구도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옥수수와 콩은 비싸질 것이고 우리는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Eke’ko / Ceramic Figure     2

에케코Eke’ko는 두 팔로 넓은 몸짓을 하고 때로는 갈라진 입술 사이로 타오르는 담배를 꽂아 넣어 꾸민 유쾌한 작은 사람이다. 에케코는 아이마라어로 ‘나를 사줘’라는 뜻이다. [에케코] 그는 알라시타스 미니어쳐를 [파는] 행상인으로 팔과 등에 짐을 지고 있다. 에케코는 또한 안데스 대지의 어머니인 파차마마Pachamama와 관련되어 있으며, 생명의 유지자로서 매우 존경을 받고 있다.

The customisation of denim matches a demand for what is not mass-produced. Strike Gold, Pure Gold, and Iron Heart ranges have understood how personal identity can be manifested in exclusive denim.

데님의 맞춤 제작은 대량 생산이 아닌 제품에 대한 전세계적 요구에 부합했다. 스트라이크 골드Strike Gold, 퓨어 골드Pure Gold, 아이언 하트Iron Heart 등의 제품군은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이 특정한 데님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In India, an estimated 100,000 GM cotton farmers committed suicide in the period 1991 to 2009 when the promise of greater yields did not materialise. They were faced with impossible debt, drinking the very pesticide they had bought to improve their situation but whose cost formed part of that debt.

생산량 증대라는 전망이 실현되지 않았던 1991년부터 2009년 사이 인도에서는 약 100,000명의 GM목화 농부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상환이 불가능한 부채에 직면하게 되자 농약을 마셨다. 이 농약은 농부들이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구입했지만, 구매비용이 다시 부채의 일부가 된 바로 그 농약이었다.

마르쿠스 뵈르괴테르Markus Wörgötter는 예술가이자  사진작가, 그래픽 디자이너로 빈에 거주하고 있다. https://www.markuswoergoet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