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gro Cloth | 니그로 천

뒤편의 구찌 우비와 모자, 맞춤 제작한 재킷을 입고 할렘 매장에 있는 대퍼 댄Dapper Dan

“나는 많은 흑인들이 날씨 때문에 체온 저하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바람도 습기도 통하지 않는 얇은 천을 걸치고 있다.”
– 혼 T.T. 보울딘 Hon T.T. Bouldin, 노예 소유자, 미국 의회, 1835년 2월 16일.

당시 ‘플림지 천flimsy fabric’은 니그로 천 Negro Clothes이라 불렸으며, 미국의 남쪽에 있는 몇몇 소수의 방직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이 천은 거칠고 표백되지 않거나 갈색의 면직, 혹은 양모와 면의 혼방이었고 노예와 죄수복에 사용되었다.  1735년의 흑인법 Negro Act에서는 [니그로 천을] 노예들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직물 중 가장 싼 직물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주인이 주는 헌 옷을 입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는 [흑인노예가 주인 주는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당시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복장 차이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18세기, 존 울먼 John Woolman은“농장의 흑인 남자는 5야드의 흰색 또는 파란색 니그로 천으로 만든 형편없는 코트와 긴 바지를 받는다. 남자와 여자들은 벌거벗은 몸을 [겨우] 가릴 정도의 아주 작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정도였고, 열 살에서 열 두 살 정도의 소년, 소녀들은 주인의 자녀들과 함께 있을 때,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많은 농장에서 노예들은 일 년에 한 번 옷감을 배급 받았다. 대부분의 노예는 [자신이 받은] 옷감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면화를 고르는 일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직접 옷도 만들어야 했다. 만약 옷이 다 낡으면, 다음 해까지 [거의] 벌거벗은 채로 지내야 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존 랜킨 Rev. John Rankin 목사는 “모든 노예제 국가에서는 많은 노예들이 노동을 하거나 잠을 자는 동안에 그들을 따뜻하게 해 줄 의복이 부족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라고 적은 바 있다. 19세기 초 노예들을 위한 칙칙하고 값싼 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매사추세츠 주, 로웰Lowell시에 있는 미국 북부 공장[1]들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로웰이라는 말은 노예들이 거친 천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예들은 자신의] 스타일 감각은 억누를 수 없었다. 인디고 염료를 만들었던 노예들은 자신의 옷을 만들 때에도 비밀리에 인디고를 사용하였다. 1744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법정의] 대배심은 “특히 흑인 여성들은 법이 요구하는 대로 옷을 입지 않고, 상당히 화려하고, 규칙에 어긋난 옷을 입는다”며 항의했다. 이는 식민 당국이 토로하는 지속적인 불만이었다. 17세기 브라질 식민 당국은 “[식민지] 국가의 여성 노예들의 복장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게 고상하다는 점”에 대해 우려했다. 1777년 미국 아룬델 카운티에서 도망친 노예 ‘딕Dick’은 건방지게도 녹색 천으로 된 코트, 파란색 커프가 달린 붉은색의 플러시 망토, 소매에 금색 레이스가 달린 짙푸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백인들은 [그에게] 경멸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이에 배우 패니 켐블 Fanny Kemble은 노예 폐지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노예들이 “프릴, 주름 장식, 리본, 양털 같은 그들의 머리에 꽂는 빗 등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고 다니는지 모른다”고 쓰고 있다.

1940년대에 미국 남부의 젊은 흑인들black Americans 과 젊은 멕시코계 2세대 파추초들pachuchos[2] 이 [앞다투어 유행처럼] 만들기 시작한 패션은 주트 수트 Zoot Suit[3]가 되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으며, 어깨를 흔들었고, 발목에 꼭 맞는 커프스로부터 위로 부풀어 오르는 형태의 바지 속에 있는 다리를 휘젓는다. 코트는 길고 엉덩이 부분이 꽉 끼며 어깨의 폭이 너무 넓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서양식의 외투가 될 수 없어 보인다. 혹은 이 옷은 할렘의 밤 문화의 언어로는 “드레이프 형태에 진짜 주름과 미치광이의 세포처럼 어깨에 패드가 덧대어진 굉장한 코트”라 불리기도 했다.

그 스타일이 어떻게,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전이 의견이 분분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옷감 배급이 성행할 당시 주트 수트는 인종적으로 ‘불량한’ 것 이자 ‘갱’의 의복으로 정의되었다. 전시산업위원회 The War Production Board는 주트 슈트를 효과적으로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재단사들은 불법적으로 수트를 계속 만들었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주트 수트족들은 경찰과 백인 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백인들은 1943년 로스앤젤레스와 디트로이트에서 인종 폭동을 일으켰다.[4] 주트 수트는 용인되기에는 너무 쿨하고 너무나도 공공연하게 반항적인 행동이었다. 1980년대 뉴욕 할렘에서 시작된 대퍼 댄Dapper Dan(다니엘 데이 Daniel Day)[5]의 하이패션의 ‘재-전유(專有)’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깔끔하게 차려 입고, 과도하게 자신을 꾸미며 외모에 대해 대단히 열정적인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많은 유명세를 얻었던 그의 가게와 디자인은 스포츠 스타, 허슬러, 힙합 아티스트들을 고객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밍크, 타조, 악어를 사용하여 “마초스럽고 민족적인 게토 스타일의 옷”을 “아프리카화 된 오트 쿠튀르”로 만들었다.

구찌, 루이비통 등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디자인을 베낀 대퍼 댄의 디자인에 법적 조치가 취해졌고 이후 그는 언더그라운드 패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2017년 구찌 크루즈 컬렉션은 1989년 올림픽 단거리 선수인 다이앤 딕슨 Diane Dixon을 위해 만든 재킷을 포함해 대퍼 댄의 디자인이 다수 소개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2017년 가을 전시에 그의 작품 일부를 [전시에] 초대하기도 했다.

[1] 로웰 공장Lowell Mills: 로웰 공장은 19세기 미국 메사추세츠 주 로웰시에서 운영되었던 텍스타일 공장으로 프란시스 카콧 로웰 Francis Cabot Lowell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월트햄-로웰 시스템 Waltham-Lowell system’이라고도 하는 “로웰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제조 시스템을 도입했다.

[2] 파추초 pachucho: 10대의 길거리 깡패, 특히 멕시코계 미국인을 의미한다.

[3] 주트 수트 Zoot Suit: 허리까지 올라오는 통이 넓은 바지와 두툼한 패드를 어깨 부위에 넣은 긴 코트를 입은 외양을 일컫는다. 1930-40년대에 걸쳐 아프리카계 미국흑인, 멕시코계 미국인 등의 사이에서 유행했다.

[4] Zoot Suit Riots: 1943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주트 수트를 착용한 멕시코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폭동. 1943년 디트로이트, 알라바마, 텍사스, 버몬트 등의 미국 각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이루어진 인종 폭동의 하나였다. 라틴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 기반한 이 폭동은 미국 군인들과 로스앤젤레스의 백인들은 주트 수트를 입은 젊은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고 1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5] 대퍼 댄 Dapper Dan(1944-): 뉴욕, 할렘 출심의 패션 디자이너, 주로 힙합, 스트릿웨서 등을 하이패션과 믹스매치하는 디자인을 선보였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구찌, 루이비통, 펜디 등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를 자신의 디자인에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Poncho Huayruru                              17

항상 용맹한 전사로 알려진 폰초스로호스는 볼리비아에서 새로운 ‘원주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2006년에 아이마라 다수민족 출신에서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로, 현지인들의 신뢰를 향상시킨 것을 보여준다. 볼리비아 아차카치의 웹페이지에서, 폰초스로호스는 그들을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Evo morales Ayma)가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볼리비아 육군예비대는 새로운 볼리비아 연립국가의 권력의 일부로 토착국가들이 편입되는 과정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현지 민병대으로 바뀌었다.” 폰초스 로호스는 산타크루스 부처의 지주들의 분리주의자와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들에 맞서기 위한 현지 민병대로써, 오래된 볼리비아 리퍼블릭의 인종차별자들이 재 집합하는 것에 경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Read more 🎧

A small ration of this ‘flimsy fabric’ of unbleached cotton was given to North American slaves to make their own clothes. It was considered important that there was a gulf between the dress of master and slave, but using the indigo they were forced to pick and make into a dye, negro women outraged the Law by dressing ‘beyond their condition’.

북미노예들이 입을 옷을 만들라고 주어진 천은 표백되지 않은 면 원단의 ‘얇은 천 flimsy fabric”이었는데, 그나마도 넉넉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복장 차이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천을 염색하기 위해 인디고를 사용했던 흑인 여성들은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는’ 옷을 입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법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

 Read more 🎧

The ties of solidarity the weavers of Cuddalore, India created against the oppressive demands of the East India Company “were not fixed, but continually made and remade … and demonstrated extraordinary inventiveness, resourcefulness and creativity”.

인도 쿠달로르 지역의 직조공 연대는 동인도 회사의 강압적인 요구에 대항하여 결성되었다. 이 연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진다… 또한 뛰어난 독창성, 지략성resourcefulness, 창의성을 증명해 내었다”

 Read more 🎧

There is no peace in my heart, nor my head, nor my blood that will itch until we have killed them all, or they have run away. But for this night fold me in your weave, warm me, make me a potato in the soil and bring me sleep before I join the others.

이제 내 마음도 머리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거나 도망가는 걸 보기 전까진 온통 혈관이 근질거립니다. 하지만 오늘 이 밤만은 당신의 판초로 나를 감싸고 흙 속의 감자처럼 따듯하게 날 지켜주세요. 형제들과 모여 다시 싸우러 가기 전에 나를 잠으로 데려가 주세요.

 Read more 🎧



Poncho Huayruru | 폰초 후아이루루

20세기 후반, 라파스[1]에서 2010년에 구입한 양모. 항상 용맹한 전사로 불렸던 븕은 판초 부대Ponchos Rojos[2]는 볼리비아에서 새로운 ‘원주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2006년 다수부족인 아이마라[3]족 출신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선출된 후 [붉은 판초 부대는] 현지인들의 신뢰를 더욱 많이 받았다. 리비아 아차카치[4]의 홈페이지에는, 붉은 판초 부대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에보 모랄레스 아이마Evo Morales Ayma[5]는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토착원주민 국가들을 새로운 볼리비아의 연합국가로 안전하게 포섭하기 위해 볼리비아 육군예비대를 민병대로 전환시켰다.” 붉은 판초 부대는 산타 크루스 정부 부처 지주들[이라 할 수 있는] 분리주의자와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들에 맞서기 위한 현지 민병대로써, 과거 볼리비아 공화국 인종차별자들의 재결집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들이 입은] 붉은 판초는 매우 신성시되었다. 붉은 판초는 비상시국[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입을 수 있었다. “공동체에 봉사하고 인정받는 50세 이상의 남성만이 붉은 판초를 입을 수 있었으며, 그들 중 특히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남자는 검정 줄무늬가 들어간 판초를 입었다. 검정 줄무늬 판초의 이름이 후아이루루였다.” 붉은 판초 부대는 볼리비아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분시키기도 했다. 그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한 곳인 아차카치 주민들 사이에서는 붉은 판초 부대가 말 그대로 적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2007년 ‘그레이트 바라크 오브 왈라 카차Great Barrack of Wala Chaka ‘라는 반정부 집회에서 [붉은 판초부대가]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두 마리의 개를 고문하고 참수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이 이야기는 [그들이] 적을 잡아먹는다는] 그 소문을 사실로 확인해주는 것 같았다. 이러한 위협은 이 지역의 주요 자원인 천연가스의 국유화와 재분배에 반대했던 산타 크루스, 베니, 판도, 타리하[6]의 ‘반달'(Media Luna) 부서와 정부가 발표한 토지개혁 정책을 겨냥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전부터 안데스 튜닉은 계속 겉옷 안에 입었지만, 17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은 판초를 원피스처럼 입고 다녔다. 판초는 일반적으로 마푸체로부터 유래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마푸체 사람들[7]은 말이 도입된 다음에 판초를 입기 시작했다고 한다. 판초를 짜는 데 6개월 정도 걸리며,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붉은 색과 검은색의) 후아이로 판초는 절기, 퍼레이드, 공식 행사, 선거 등 기념 행사와 종교 행사 때 입는다. 분홍색 판초는 카니발과 같은 축제에 입고, 오렌지색은 지역사회의 내부 행사가 있을 때, 초록색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를 발표할 때 입는다. 그리고 노발색(흙색)은 주로 겨울에 입는다.

“패션을 재단하고 맞춤에 의존하는 것은 계속해서 천을 짜는 행위가 영적인 힘을 전달한다는 생각과 상충한다. 비교적 비상업적인 분야에서는 천을 자르는 것을 여전히 금기시한다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예를 들어, 일부 인도네시아인들은 입는 옷감과 신부의 예단 위한 옷감을 지금도 구별한다. [일상에서] 입는 옷을 위한 옷감은 자르고 꿰매지만, 신부의 예단을 위한 옷감을 짤 때에는 실이 끊이지 않게 하여 ‘연대감과 혈통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1] 라파스(스페인어: La Paz, 아이마라어: Chuqi Yapu, 문화어: 라빠스)는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이다. 1548년 에스파냐의 알론소 데 멘도사 선장이 건설했다. 알티플라노 고원에 위치해 평균고도가 3600m에 달한다. 티티카카 호가 가까이 있다.

[2] 폰초스 로호스 Ponchos Rojos, 즉,  붉은 판초 Red Ponchos는 오마수이스Omasuyos의 안데스 지역에 있는 볼리비아 군대로, 아이마라Aymara 예비군을 포함하는 민병대를 뜻한다.

[3] 아이마라족은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과 알티플라노 고원 지역의 민족이다. 볼리비아와 페루, 칠레 등에 약 2백만 명이 있다.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라족이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최초로 소수민족이 정치인이 되었다.

[4] 아차카치(스페인어: Achacachi)는 볼리비아 라파스 주에 위치한 도시로 높이는 3,854m, 인구는 8,857명(2012년 기준)이다. 티티카카 호 동안과 접하며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스에서 북서쪽으로 9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5]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 2006년-2019년 아이마라족 출신의 대통령으로 스페인 정복후 470년이래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6] 타리하는 볼리비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타리하 주의 주도이며 면적은 401km², 높이는 1,854m, 인구는 234,442명이다.

[7] 마푸체(Mapuche)는 현재의 남아메리카 칠레 중남부와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지방에 걸쳐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전통적으로 마푸둥군어였고 현재는 에스파냐어를 쓰는 사람들도 많다.

 

미라 마스크mummy mask는 주로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천으로 여러 번 감싸 부피가 커진 죽은 사람의 얼굴로 표현된다. 노트헤드the note head(이네스 확인)는 위쪽에 놓여 있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찬카이Chancay 문화의 직물 조각들일 것이다. 찬카이 문화의 직물은 해안 계곡에 위치한 5000곳에 매립되어 있으며, [그 중] 많은 양은 약탈당하여 국제 유물 시장에 나와 있다. 페루 지역의 자원 부족과 부유층의 부패하고 방만한 관세 규제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또한 신중하게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하는 부산물도 있었다.

Creole daughter of European parents, to the jet black Congo Negro, people of every gradation of colour are seen, 18 in all according to an 19th-century European traveller.

19세기 유럽인 여행자에 따르면, 유럽인 부모의 딸인 크리올부터 제트블랙 콩고 니그로 크리올까지, 사람들은 18가지 종류의 피부색으로 분류되었다

 Read more

The Navajo Indians gained additional weaving skills from Pueblo Indian refugees fleeing repression after their successful uprising against colonial religious fanaticism. The Navajo acknowledged Spider Woman, who they said had taught them weaving, as a Pueblo woman. In her honour the weavers left a hole in the centre of each blanket like that of a spider’s web.

나바호 인디언들은 식민지 종교적 광신주의에 대항한 봉기가 성공한 후 압제에서 탈출한 푸에블로 인디언 난민들로부터 추가적인 직물 제작 기술을 얻었다. 나바호는 거미줄 짜는 것을 가르쳤다고 말한 스파이더 우먼을 푸에블로족 여성으로 인정했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거미줄처럼 각 담요의 중앙에 구멍을 남겼다.

Since the ‘War on Drugs’ in Mexico started in 2006, 45,000 deaths have occurred involving gangs, the army, and a variety of special squads. These figures are far higher than those in the occupation of Afghanistan. Federal statistics have shown that nearly 2000 people were killed in the first month of 2017.

2006년 멕시코에서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폭력조직, 군대, 각종 특수부대 등 4만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수치는 아프가니스탄 점령지의 수치보다 훨씬 높다. 연방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7년 첫 달에만 약 2000명이 사망했다.



Textile Fragment 

바이엘 컴퍼니의 특허 받은 주홍색scarlet 광고는 의식적으로 현대적이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멋진 기사들의 전통적 세계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다. 또한 1876년 필라델피아 국제박람회에 참가하여 받았던 메달을 보여주는데, 이 전시회는 “일반적으로 콜타르 색상의 아름다움”으로 칭송되었다.

나스카 Nazca. 400CE 추정. 1978년 쿠스코에서 수집, 개인 소장품, 아카이브에 대여.

이것은 튜닉의 한 조각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직물] 조각의 생산에 엄청난 양의 수공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한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7킬로미터의 서로 다른 색깔의 실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이 [직물] 조각은 금이나 은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때때로 다른 문화권에서 [이 직물은] 명예를 의미하는 로브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금실의 가격이 로브의 라벨 위에 꿰매져 있었다. 그 직물은 두 개의 울 판넬을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스페인 침공이 있기 전까지 안데스는 독자적인 예술을 발명한 고립된 세계였다. 나스카 2단계에서[1] 씨실과 날실의 인터로킹interlocking 기술은 최대의 발전을 이루었는데, 여기서 “씨실과 날실은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이동하지 않고 특정 색상 영역만 왔다 갔다 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적이다”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원리는 태피스트리와 유사하다. 단, 디자인의 각 섹션의 가장자리에서 씨실과 날실 모두 색을 변경하여 동일하게 가시화한다는 점은 제외하고 말이다. 나스카 문화의 발전은 친차Chincha, 피스코Pisco, 이카Ica, 나스카Nazca, 로마스Lomas의 계곡에 있었다. 각 구역은 직물에 있는 사람, 동물, 식물을 고도로 양식화한 표현법을 가지고 있었다. 악기와 마찬가지로 성별 역시도 재현되었다.

이는 강한 종교적 성격과 위대한 천문학자들이 별들의 움직임과 별자리들에 대한 뚜렷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문화였다. 나스카 팜파의 장대한 지상화에서와[2][2] 같이 이것들은 동물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안데스 직물은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연속적인 씨실과 날실의 기술이 특징이다. 남미의 안데스 직물 전통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섬유 역사를 갖고 있다. 섬유 예술은 대략 기원전 10,000년부터 이 지역에서 존속되어 왔다. 직조기 직물은 페루 북부의 전 세라믹 시기(기원전 3000-1800년)에 처음 등장한다. 초기 지평선 시대 Horizon Period(기원전 1800-0년)까지 거의 모든 기법을 사용한 직조기로 짠 직물이 볼리비아, 칠레, 페루의 남쪽 고지대와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초기 중간기(0-500 CE) 안데스 직물 전통은 불연속적인 씨실과 날실 기법을 추가하고 자수에 초점을 맞춰 완전하게 발전했다. 중기 지평선 시대(500-800 CE) 동안 직물은 알려진 거의 모든 직물 구조에서 사용되었다. 좋은 직물은 주로 남부 안데스 지방의 인터로크 태피스트리 기법으로 짜여졌다. 낙타과 섬유(알파카, 라마, 비쿠냐)와 목화가 모두 사용되었고, 독특한 기후 조건 때문에 이 고대 직물들 중 매우 많은 수가 살아남았다.

[1] 나스카 문명은 일반적으로 프로토 나스카 (1단계, 100BC ~ 1AD), 초기 나스카(2~4단계, 1~450AD), 중기 나스카(5단계, 450~550AD), 후기 나스카(6~7단계, 550~750AD)로 나뉜다.

[2] 나스카 라인 Nazca Lines: 페루의 나스카 팜파 지역의 사막에 넓게 펼쳐져 그려진 수십 개의 거대한 이미지들로 대개 양식화된 동물의 형상들이다.

Textile Fragment                              10

섬유 예술은 대략 기원전 10,000년부터 이 지역에서 존속되어 왔다. 직조기 직물은 페루 북부의 전 세라믹 시기(기원전 3000-1800년)에 처음 등장한다. 초기 지평선 시대 Horizon Period(기원전 1800-0년)까지 거의 모든 기법을 사용한 직조기로 짠 직물이 볼리비아, 칠레, 페루의 남쪽 고지대와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초기 중간기(0-500 CE) 안데스 직물 전통은 불연속적인 씨실과 날실 기법을 추가하고 자수에 초점을 맞춰 완전하게 발전했다. 중기 지평선 시대(500-800 CE) 동안 직물은 알려진 거의 모든 직물 구조에서 사용되었다.

 Read more

Despite its biblical link to the Whore of Babylon, it replaced purple as the colour for the cassocks of Roman Catholic cardinals in the 13th century. Later this then provided extremist Protestants with the material to talk of the ‘scarlet whore of Rome’ and it continued popular life as the colour of ‘loose’ women.

주홍색은 성서에서 바빌론의 창녀와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 로마 가톨릭 추기경들의 캐속[1]cassocks의색이었던 보라색을 대체했다. 후에 이 연관성은 극단주의 개신교인에게 ‘로마의 주홍색 창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했고, 이는 ‘문란한’ 여성들의 색으로 대중적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 16~17세기경 유럽의 보병이나 기병이 착용한 무릎길이의 승마용 외투. 17세기 후반에는 일반 남성도 입었다.

 Read more

A strike which began with the destruction of the hated company store and against ‘identification’ passbooks containing the disciplinary history of each textile worker in Pueblo, Mexico was met with bloody repression, but was the start of a wave of empowering strikes continuing through the Mexican Revolution.

파업은 멕시코 푸에블로에서 각 섬유 노동자들의 징계 이력이 담긴 ‘식별’ 장부에 반대하며 증오하는 회사의 상점을 파괴하며 시작되었다. 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탄압에 부딪쳤지만, 멕시코 혁명을 통해 계속되는 세력화 파업의 시작이었다.

 Read more

Things then got really out of hand as her sister called for a shamanic conference in Germany. Their verdict was serious. I must send all the textiles back to the Andes or burn them on the bank of a river. I must do this, was the agreed opinion, because my life was under threat from spirits in the textiles. They did not want to be in Austria and were directing their aggression towards me.

그 후 그녀의 여동생이 독일에서 무속 회의를 소집하면서 상황은 정말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평결은 심각했다. 나는 모든 직물을 안데스 산맥으로 돌려보내거나 강둑에서 태워버려야 했다. 직물에 대한 신념때문에 내 삶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직물을 없애야만 했다. 그들은 [그 직물이] 오스트리아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들의 공격성은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Read more


Ruth Noack | 루스 노악

피나포어[1]Pinafore. 그 소포는 비엔나를 거쳐 어딘가에서 도착하는데, 그 곳에서 개봉되어, 내용물을 꺼내고, 이송되고, 평가(감정)되고, 잠깐 동안 어루만져진다. 다시 되돌려 놓을 때가 될 때까지, 포장지에 넣고 상자에 묻는다.

나는 어딘가에 있던 적이 없다. 어떤 장소와 상상에만 존재하는 관계는 불충분하다.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백은 추측이나 예상이나 연구에 의해 색깔이나 소리, 도표와 이야기로 바뀔 수 있는 잠재성이다. 나에겐 아니다. 나는 그 빈 공간에는 갈 수 없다. 내가 어딘가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손가락을 데일 수도 있다…”). 나와 어디엔가 사이에는 비엔나와 소포 두 가지가 위치해 있다. 비엔나에 가본 적이 있다. 내가 아는 비엔나. 그녀가 사는 곳이다, 그녀가 소포를 나에게 보낸 곳이다. 비엔나(그리고 그녀)는 내 환상에 동반된다. 그들은 내가 함께 살기에 꽤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유령들이다. 반면에 소포는 단순히 존재한다. 소포는 어느 날 내 문 앞에 나타났고, 지금은 내 앞에 앉아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다. 소포를 연다. 바로 그거다. 앞치마가 들어 있다.

그 앞치마들은 그녀에 의해 어루만져 졌을 것이다. 다른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녀는 앞치마들이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앞치마는 프릴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확실히 프릴이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것들을 푸는 동안, 앞치마는 종이 꽃처럼 열린다. 풀을 먹인 주름 장식들은 스스로 수명을 연장하며 호흡을 시작한다. 아니면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그 순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 이런, 그들은 평범하다. 심지어 그들의 무늬도 평범하다. 키치하지도 않고, 개념적이지도 않다. 나는 그 패턴들 속에서 비밀도, 의미도, 유산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촐라Chola[2]“나 “중국산”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그들이 중얼거리는 “패턴”뿐이다.

그리고 색깔들을 보라. 저것이 진짜 색깔인가? 진흙투성이의 갈색, 값비싼 천연 섬유와 쉽게 어울리는 흙빛 톤은 어디에도 없다. 시커먼 땅에 맥없는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치 그들이 너무 많이 씻은 것처럼. 심지어 분홍색조차도 회색처럼 보인다. 나는 다른 연상들로 날아간다. 일본인들, 아무리 따분한 옷감이라도 아름다움을 찾는 재주가 있지 않은가? 만약 내가 그들의 관점을 가진다면, 나는 …할 것이다. – 아니, 아직 뭔가 이상하다.

원단을 보자. 플라스틱이 아닌. 확실히 면이다. 얇지만, 화려하면서 속이 들여다 보이는 예복, 레이스 행커치프나 베일과 비슷할 정도로 얇지는 않다. 오히려 저렴한 정도로 얇다. 이런 앞치마에 손을 말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리기 전에 젖은 손. 그리고 그 후에 젖은 손에 환멸을 느꼈다. 공산주의 시절 이런 수건이 생각난다. 녹말이 씻겨 나간 후에도 전혀 쓸모가 없다. 잠깐, 이웃집 부엌에서도 봤다. 벽에는. 장식용 수건. 사과와 새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천천히, 새벽을 이해한다.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 지금쯤이면, 나는 모든 포장을 풀고 앞치마들을 내 주위에 펼쳐 놓았다(방은 에이프런으로 가득 찼다!). – 그 이상한 동물들로부터, 그 흐트러진 새들로부터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나는 그 불쌍한 것들에 투영하고 있지만, 우리 사이에 분명히 유대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앞치마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구식’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훨씬 더 빈틈없는: “피나포어”이다.

두 개의 결연한resolute hand 손이 나타나서 뒤에서 피나포어를 잡고, 세게 흔들어서 프릴과 접는 순서를 만든 다음 조심스럽게 몸 앞에 놓는다고 상상해보라. 홀터는 목 위로 넘어가고, 끈은 중간에서 묶이고, 완벽하게 매듭이 지어지며, 나비매듭은 뒤쪽/앞쪽을 중심으로 한다. 휴식을 취하기 전에, (이전의 세척때문에 아직 붉은) 양손은 피나포어에 마지막 주름을 주어, 그것으로부터 모든 의지의 찌꺼기를 바로잡고, 거기서 끝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녀는 소녀였을 때 두 벌을 입었다. 하나는 일상의 일부였다. 그것은 옷을 먼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누군가는 남자들의 더러운 접시를 식탁에서 치워야 한다. 소스가 솜에 스며 들며 흘러간다. 젖은 손(또는 더러운 손)은 정말로 반복적으로 건조(또는 세척)이 된다. 어쩌면 몰래 앞치마의 귀퉁이에 코를 풀었다 그리고 일요일이 왔다. 옷을 갈아입었다. 다른 하나를 옷장에서 꺼낸다.  좋은 것. 그게 더 편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더 좋은 옷은 목을, 너무 예쁘다, 오 너무 예쁘다…! 그리고 새 앞치마도 놓여있다(고정되어 있다).

아아, 명절(쉬는 날)에도 접시는 치우고 씻어야 한다. 집안일이 끝났으니, 여자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놀러 나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 소녀가 그녀의 예쁜 앞치마를 잘 유지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옷은 긁힌 드레스와 함께 일요일에만 입는다. 어떡해, 어떡해? 그녀의 어른들은 일을 바로잡는 법, 영혼을 잘 으스러뜨리는 법을 안다.<원문>  일요일에는 앞치마를 두 개씩 입고, 새 것 위에 더러운 앞치마를 입고, 악으로부터 그것 그리고 옷과 그 밑에 있는 몸 을 보호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소녀가 여자로 성장했다. 그녀는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요리를 한다. 쾌락은 기껏해야 한 팔 거리에 있다. (자신을 속이지 마라: 이런 것들은 결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녀는 그녀의 실크 바지를 좋아한다. 얼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나는 피나포어를 입고 있는 여자들을 상상한다. 내 판타지에서는, 그녀들은 자존심이 강한 여성다움으로 자신을 꾸민다. 그들의 의복은 그들의 몸을 장식하는 것 이상이다. 매듭이 묶이고 접힌 주름이 평평하게 될 때, 그들의 몸은 동그랗고 스스로에게 진짜가 된다. 그(피나포어) 밑에 가려진 허벅지가 아니라, 어루만져지는 것이 진정한 원단일까. 그녀는, 나도 안다, 욕망이나 동정심 때문에 어루만지지 않는다. 그녀는 여자들이 피나포어를 입은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생각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녀는 세련됨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피나포어가 예쁘다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피나포어의 많은 부족함(실용성이 부족하고, 미적 기교가 부족하고, 현재 의도된 유저십이 부족한 것)이 그녀를 은근히 기쁘게 한다. 그것들은 자율적인 것이다. 현재로서는.

[1]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덧입으며, 소매 없는 에이프런 형태의 옷이며, 가슴바대를 어깨끈으로 연결한 점퍼스커트이다. 주로 어린 소녀들과 여성이 많이 입는다.

[2] 스페인계와 아메리카 원주민 피가 섞인 라틴 아메리카 여자


Remix | 리믹스

볼리비아의 시인 하이메 샤엔스Jaime Saenz[17]가 옷감 스크랩으로 만든 아파라피타스 자켓을 입고 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부유함을 뽐내는 행동은 의복에 과도하게 많은 벨벳 천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 방대한 양의 벨벳은 쓰레기 더미로 향할 운명이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모두 벨벳을 아껴서 사용했고, 신발이나 지갑, 방한용 토시, 옷의 가장자리를 제작할 때 재사용했습니다. 대단히 견고하게 조직되어 있는 금색 바탕의 벨벳은 가장 작은 조각에 사용했고, 버려진 옷에 떼어 내서 다른 품목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나바호족Navajo[1]의 축복받은 방직공들은 멕시코의 스페인 군인 담요에서 실을 뽑듯 상업용 플란넬flannel천인 바예타bayeta[2]천에서 붉은 실을 풀어냈고, 다른 색실과 엮어 짜서 방적기를 돌렸다. 멋진 색을 다양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붉은색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물러나보면 바예타 천의 기원은 캐나다의 잉글리시 베이English Bay(올이 거칠고 성긴 모직물)이다.  바예타 천은 스페인으로 수출되어 현지의 풍부한 코치닐을 공급받아 붉은색으로 염색되기도 했다. 1746년 북아메리카에서 이 바예타 천이 광고되었고 상용화가 시작되었으므로 북아메리카에 사는 나바호족은 바예타를 공급받기 쉬웠을 것이다. 서아프리카 요루바Yoruba와 에도Edo의 직공들은 수입 직물에서 풀려나온 털실로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의 양단[3] 무늬를 짜고 현재 가나Ghana에 속하는 아샨티족Asante[4] 고위층을 입힐 켄테kente[5] 의상을 만들어냈다. 태피터taffeta[6] 옷감과 여타 해외 직물 수입에 의존해서 실을 뽑아내는 데에 사용했다.

특정 격자무늬로 짠 수직(手織) 인도 마드라스Madras 무명 천은 19세기부터 영국을 통해 나이지리아Nigeria로 유통되었고 나이젤 델타 삼각주Nigel Delta[7]의 칼라바리Kalabari족 사람들에게서 큰 호평을 샀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이 천에서 하얀색이나 밝은 색의 실을 뽑아내는 “뺄셈의 디자인design by subtraction”을 추가했다. 바늘과 레이저 날을 이용해 실의 마지막단을 끌어올려 잘라내고, 짧아진 실을 끌어당겨 천에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 방식을 통해 마드라스 천은 칼라바리족의 전통 옷 필리트 바이트pelete bite[8]로 변신했다. 이 옷을 귀중한 상품으로 여기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착용했다.

현대 마야 여성들은 ‘취미삼아 손으로 만든 브리꼴라쥬bricolage’ 섬유를 “종종 우아함보다 독창성을 가미하여 짜고 구획별로 효과를 나눠 구성했다. 양모와 생 목화, 아크릴과 금속 합성실, 인디고와 아닐린염료aniline dye, 리크랙rickrack[9], 레이스, 거즈와 폴리에스테르 등을 사용했다. 이는 ‘임시로 만든 것’ 그 이상이다. 여성들의 직조활동에서 일어난 의도적인 ‘전용appropriations’이며 이들의 즉흥 창작은 어떤 경우 문화적인 전복이 되기도 했다. 그와 유사한 것으로, 치리구아노 과라니 부족Chiriguano guarani[10]의 농업축제는 크리오요인Criollo[11] 카니발과 함께 이루어졌다. “고유성과 시적인 면모를 잃지 않은 채 이질적인 상징으로 가득한 제의를 통하여 [그들의] 사회적 연결고리와 소유권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가면은 아라와크Arawak 차네Chané족의 제의에서 썼고 실크 모자top hats는 식민지의 산물이었으며 의상은 안데스의 영향을 받은 메스티조 의상이었다. 치리구아노Chiriguano족, 크리오요Criollo인, 안데스 풍, 니바크레Nivaklé 족[12],  렝구아Lengua[13]족, 메노나이트Mennonite[14] 교회 풍으로 장식품을 꾸렸다. 몇몇은 재규어 호피와 왜가리 깃털, 카라구아타caraguatá 섬유로 만든 천과 더불어 오토바이 장갑, 가발과 색안경들까지 동원하여 변장했다.

매의 날개로 장식한 암홍색 나무 가면은 꼴라쥬와 같았다. 잡지에서 오려온 얼굴과 야생 들고양이의 털로 만든 마스크, 멧돼지pecarí나 들판의 사슴들이 판자, 플라스틱 소재의 다른 재료와 모여서 가면위에서 어우러졌다. 선조와 신화 속 야수들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배트맨Batman과 이티E.T와 축제를 나누었다. 브라질 중심부 카야포Kayapo족[15]의 오 네크렉스õ nêkrêx는 장식품 혹은 개별적으로 상속된 특정한 권리를 뜻하며 매우 존경받는다. 다른 부족에게서 유래한 것일지라도 치장의 혁신은 그 창작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화재로 한 동네가 전소된 후 중요 의식 마지막 무용에 써야 하는 깃털 머리 장식이 사라졌다. 그 장식이 없으면 수치스러운 쇼가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시내에 가서 다양한 색의 플라스틱 빨대를 구매해 머리장식을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멀리서 보면 아카족áká의 깃털 머리 장식처럼 보였다. 장식을 만들 독점적인 권리는 유산과 같이 상속되었지만 그래서 아카족의 장식은 아카족이 만들 수 있지만 만일 누군가가 충분한 깃털이 없거나 단순히 새로운 모습으로 꾸미는 걸 좋아한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권리를 ‘빌려’주곤 했다.” 

1970년대, 라파스의 아파라피타스aparapitas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남성은 모든 색과 모양과 재질의 옷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 펠리페는 엄지손톱 만큼 작은 조각부터 손만큼 커다란 것도 보았다. 벨벳, 헤센hessian[16], 플란넬, 실크, 마루걸레, 모직물, 캔버스, 고무, 데님, 삼베, 샤모아 가죽, 리넨과 유포로 된 조각들이 있었다. 동그란 것, 네모난 것, 세모난 것, 다각형으로 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완벽히 들어맞으며 어떤 것은 흉하고 또  어떤 것은 깔끔했다. 그러나 모두 매우 꼼꼼하게 바느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실, 마포, 전선, 신발끈, 줄, 가죽으로 만든 실과 선 등 아주 다양한 재료와 함께 사용했다.

피노체트Pinochet[18]군부 시절, 산티아고 데 칠레Santiago de Chile의 빈민가 여성들이 면 조각과 낡은 옷 조각으로 아필라arpilleras[19] 자수를 놓았다. 아필라는 교회에서 판매했다. 사람들이 이 자수를 사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여성들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고충들을 수놓았고 그 고충들은 보기 흉한데’ 사람들이 구매를 하자 놀라워했다.

[1] 나바호족Navajo 북아메리카 대륙의 남서부에 주로 살고 있으며 인디언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한다.

[2] 바예타bayeta: 올이 촘촘하지 않고 느슨한 양모. 걸레를 뜻하기도 한다.

[3] 양단: 금, 은색 명주실로 두껍게 짠 비단.

[4] 아샨티Asante;Ashanti: 서아프리카 황금해안의 왕국 및 부족 명칭. 가나 남부와 토고, 코트디부아르 지역에 산다. 아샨티 왕국은 1695년경 오세이 투투(Osei Tutu, 재위 1697~1731)가 삼림지방의 부족을 통합하여 세운 왕국이며, 18세기에 연안부 유럽인의 상업상 근거지로 발전, 1901년 영국이 멸망시킬 때까지 존속했다. 화려한 색의 천을 생산하고 그 천으로 가나의 전통 의상을 만든다.

[5] 켄테Kente: 아프리카 가나의 남성이 착용하는 고대 로마의 토가와 비슷한 화려한 색무늬의 감는 옷.

[6] 태피터Taffeta is a crisp, smooth, plain woven fabric made from silk or cuprammonium rayons as well as acetate and polyester. The word is Persian (تافته) in origin …

[7] 나이젤 델타Nigel Delta: 나이지리아 남부의 삼각주, 아프리카 최대의 석유생산지. 토착 민족은 칼라바리 Kalabari 족이다.

[8] 필리트 바이트pelete bite: 칼라바리의 이조Iijo족이 만드는 천. Pelete는 ‘실을 자른다’, Bite는 옷이라는 뜻이다. 천을 조밀하게 짜서 실을 잘라 올을 빼서 구멍을 만든다.

[9] 리크랙rickrack: 어린이 옷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지그재그 모양의 납작한 끈.

[10] 치리구아노Chiriguano: 남아메리카 중부의 아르헨티나·볼리비아·파라과이에 걸친 광대한 평원 그란차코 Gran Chaco에서 활동했던 토착민족들 중, 볼리비아에 거주하는 과라니Guarani부족의 한 계열.

[11] 크리오요Criollo: 아메리카 대륙의 에스파냐계열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식민지 사회에서는 인디오·흑인·여러 혼혈집단을 지배하는 특권계층을 형성하였으나, 식민지 관료기구나 교회조직에서도 현실적으로는 페닌슐러와 명확히 구별되어 차별대우를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말기에는 지방관료, 하급성직자, 상인계층으로서 식민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독립혁명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유럽에 강하게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형성된 독립국가에서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백인 아닌 여러 집단은 사회적·문화적으로 차별 대상이 되었다.

[12] 니바크레Nivaklé: 그란차코의 토착민족 중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에 주로 사는 부류.

[13] 렝구아Lengua: 그란차코 토착민족 중 파라과이에 사는 부류.

[14]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자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에 의해 생겨난, 재세례파(再洗禮派) 중 최대의 교파. 제세례파는 종교개혁 시기에 출발한 프로테스탄트계열 종파이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 퍼져 있으나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되어 있다

[15] 카야포족Kayapo: 아마존 남부 지류 토착민족.

[16] 헤센hessian(burlap): 자루를 만드는 데 쓰는 튼튼한 갈색 천.

[17] 하이메 샤엔스 구스만Jaime Sáenz Guzmán(29 October 1921.10.29-1986.08.16. 볼리비아): 볼리비아의 시인, 소설가, 단편 작가다. 라파스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으며 안데스의 거친 지형과 혹독한 기후는 그의 작업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장르를 구분하기엔 어려운 독자적인 색채를  띠는데 초현실주의 문학과 유사한 면모가 있다. 오랜 시간 알콜 중독과 싸웠고 그의 시에도 나타난다. 항간엔 저주받은 시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오픈된 양성애자이기도 했다.

[18]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1915.11.25-2006.12.10. 칠레): 칠레의 군인·정치가. 육군·해군·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신헌법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저항하다 대통령 집권연장찬반투표에서 패했다.

[19] 아필라arpillera: 1970년-1980년대 필레의 군부독재 피노셰 정권 시절에 유행했던 밝은 색상의 조각보.


2002

2013년 방글라데시 공장 붕괴의 현장.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관계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라나 플라자 Rana Plaza 죽음의 덫에 빠진 마지막 순간 속에서 서로를 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제31 여자중학교에서 14명의 학생이 화재로 숨졌다. 이 학교는 보수적인 성직자들이 관리하는 정부 기관 ‘여학생 교육 총회장 the General Presidency for Girls’ Education’에 의해 운영되던 곳이었다. 남녀의 완전한 분리를 위해 매우 폐쇄적이었던(폐쇄적인 구조였던) 이 학교는 과밀 위험 경고와 소화기, 화재경보기의 부족하다는 경고를 무시해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망은 ‘선행을 권장하고 악행을 방지하는 위원회the Committee for the Propagation of Virtue and the Prevention of Vice’[1] 소속 종교경찰들의 행동으로 발생한 것이 확실하다. 이들은 여학생들이 두건과 검은 예복(아바야 abayas)으로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이 건물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저지했으며, 구조대원들의 구조를 방해했다. 종교경찰은 여학생들과 민간 구조대 사이에 신체적 접촉이 발생할 위험이 있고, 이는 결국 성적 유혹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았다. 한 목격자는 경찰 3명이 여학생들을 구타해 탈출하는 것을 막았다고 이야기했고, 또 다른 목격자는 여학생들을 도우려고 했으나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제지당했다고 진술했다. 민간 구조대 관계자는 여학생들이 정문을 통해 나올 때마다 경찰들이 강제로 다른 곳을 통해 돌아 나오게 했다고 말했다.

이는 1932년 도쿄에서 발생한 이른바 ‘시로키야 화재 사건 Shirokiya Incident’과 닮아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 비극적 사건은 기모노의 단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많은 여성이 서구식 속옷을 입게 만든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시로키야 백화점 건물에 불이 나자, 기모노 차림의 여자 직원들이 5층에 갇혔다. 기모노를 입은 상당수의 직원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노출될까 두려워했고, 이에 건물에서 뛰어내리지 않아 결국]사망했다고 신문들은 보도했다. 사건 이후 즉시, 판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속옷을 착용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메카 여학생들이 화재에서 탈출하지 못해 숨진 이 사건은, 제1세계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는 방글라데시 섬유 공장들에서 발생한 화재 사망 사건의 역사와 끔찍히 닮아 있다. 불과 1년 전인 2001년 8월, 미코Mico 공장에서도 24명의 여성 근로자가 숨지고 백여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7층에서 발생한 화재를 피하고자 탈출을 시도했으나, 출구가 잠겨 있어 출구 쪽 계단에 갇힌 채 발견되었다. 이는 시브푸르Shibpur에 있는 차우두리 니트웨어the Chowdhury Knitwear 공장에서 대부분 10대 소녀였던 54명의 근로자가 화재로 사망한 사건에 이어 발생한 일이다.  이들은 야근을 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대피하려 했으나 외부에서 비상구와 출구를 잠가 두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강제로 시행된 추가 업무 시 폐쇄된 출구와 과부하 된 전기회로가 원인이 된 화재에 대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반복되어 왔다.

2013년 방글라데시 공장 붕괴의 현장.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관계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라나 플라자 Rana Plaza 죽음의 덫에 빠진 마지막 순간 속에서 서로를 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인명 손실보다 직물 도난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잠겨진 문과 창문 창살은 2013년 카라치Karachi에 위치한 알리 엔터프라이즈Ali Enterprises에서 발생한 끔찍한 화재에서 293명의 사망자와 심각한 상태life-restricting의 부상자를 만들어내는 것에도 일조했다. 현재, 화재의 원인이 업주들의 보호금 지급 실패 the failure of the owners to pay protection money라 주장하지만, 사망 원인이 된 것은 탈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건 발생 불과 한 달 전, 공장이 서구에서 승인한 안전확인서Western-approved safety certificates를 발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일이었다.

[1] 전통 무슬림 행동 규범 감독을 담당하는 가자 지구The Gaza Strip의 한 단체


7 Aprons, 13 Photographs | 7개의 앞치마, 13장의 사진

20세기 말, 시장의 여성들이 착용한 면과 합성 섬유; 2008년 라파스 길거리 시장에서 수집. 크레타 섬의 풍요의 여신들과 아시리아 사제들은 신성한 앞치마를 입었고,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보석이 박힌 앞치마를 입어 그들의 지위를 보여주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상인과 장인들이 옷을 보호하기 위해 앞치마를 입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에이프런 맨’으로 불렸다. 에이프런 맨이 매우 흔해지자 몇몇 무역업자들은 그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스타일을 자랑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행동력에 관한 한, 안데스 사회는 여전히 패권적 유럽인들과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학이 만들어낸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1930년부터 1960년까지 쿠스코Cuzco[1]의 시장 여성에 대한 마리솔 드 라 카데나Marisol de la Cadena[2]의 연구는 원주민과 메스티자의 분류가 원시인에서 문명인으로 발전하는 과정과 유사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상황을 다르게 설명한다. 오히려 이 연구에서 원주민에 대한 관점은 끝없는 관계 분류를 통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다. 그녀는 인종적 범주가 인종 차별적 분류에 기초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특정한 상호작용에 의해 협상되는지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메스티자스mestizas는 원주민 여성과 달리 하인이 아니라 도시에 살면서 상인으로서 훌륭하게 생계를 꾸린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원단의 질, 블라우스 모양, 숄을 착용하는 방식, 모자 소재 등을 바탕으로 메스티자와 그들의 고객들은 원주민과 부엔 메스티자buen mestiza(좋은 메스티자)를 각각 최하와 최고 위치에 두는 분류 체계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그러면 여성은 원주민, 메스티자 심플(단순 메스티자), 카시 다마스casi damas(거의 숙녀), 다마스damas(숙녀) 및 부에나스 메스티자스buenas mestizas(좋은 메스티자스)로 인식된다.  일반적으로 계급을 나타내는 옷은 민족 의상과는 별개로, 각기 다른 경제 상황을 가리키는 권력 구조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계급은 계속해서 변화할 수 있는 상황에 따른 상호작용에 대한 해석 역시 허용한다. 예를 들어, 옷을 갈아 입음으로써 원주민은 다마dama가 되거나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옷을 입는 방법을 배우는 오랜 과정에 선행하는 사회적 변혁을 표현한다. 식민지 지배자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여성의 망토인 악수aksu는 계속해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더욱 외진 지역 사회에서는 스페인이 그들의 정책을 시행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특히 볼리비아에서는 원주민 여성들이 스페인 스타일의 옷보다 악수aksu를 계속 입었다. 풀 스커트 위에 앞치마로 입는 오늘날의 시장 여성의 앞치마는 변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1] 쿠스코는 페루 남동부 쿠스코 주에 있는 도시이다. 80 km 북서쪽으로 마추 픽추가 있으며, 안데스 산맥 사이의 해발 3600m에 있다. 현재 인구는 약 30만명이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하고 타완틴수유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2] 마리솔 데 라 카데나 Marisol de la Cadena: 페루 리마 출신. 인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