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object과의 소통에 관해서: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체로 그것은 미적 대상이거나 문화적 가공물이며,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을 걸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아주 흥미롭고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만일 그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지 않거나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을 경우에 수용자인 나에게는 [그것이]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의미나 감정affect의 전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대상이 말을 건다고 전제하게 되는 언어는 그렇게 쉽게 식별되거나 분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목소리의 대행자나 저자가 있는 경우와 같이 의도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수수께끼의 중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대상이 주체의 응시gaze에 의해 활성화되는 경우인데, 이 때에는 소통이 가능하다. 둘째, 그러한 소통은 친숙하던 낯설던 간에 일종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독 및 번역이 가능하다.
우선, 먼저 의도하는 대상의 지위는 자연적이던 문화적이던 그것의 기원과 관련이 있으며, 후자인 문화적 대상의 경우에는 항상 재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재적인 사용 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은 다소간의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모양, 소리, 색깔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론 문화적 맥락과 판독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어느 정도 매력적이기도 하고, 불분명할 때도 있으며, 눈에 보이고 해독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상이 도드라져 보이게 하거나 배경에 묻혀 보이게 하는 시각적 외양appearance이나 정체성identity을 대상이 의도한다고 볼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는 어떤 대상이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단적인 믿음에서부터 기독교적 범신론을 넘어서는 종교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모더니즘의 난제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이러한 견해는 놀랍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을 문화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보편적인 추상언어라는 모더니즘적 전술은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우리가 이처럼 권위있는 방법authored policy의 변방에서, [다시 말해] 모더니즘적 사유의 가장자리에서 의도하는 대상에 대한 이론화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주변부에서 볼 때에만 전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모호한 텍스트가 바로 그 가장자리에서 동시대 저자들과 조응하게 되기 때문인 듯하다.
[여기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나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 같은 저자들이 주체subject에 대해서 언급한 글을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다른 접근법과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물의 언어라고 일컫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1]은 계획적인 제목이 붙은 『월드 스펙테이터World Spectators』[2]이라는 저서에서 ‘사물의 언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물이 어떻게 소통하고 상대방의 시선을 원하는지를 상술하며, 의도하는 사물들과 곤충들에 대해 서술한 카이유와의 이론을 정확히 그려냈다. 벤야민은 사물 소통 개념에 대해 텍스트를 썼는데 이는 정확히 「사물의 언어The language of Things」라는 제목을 가진 히토 슈타이얼의 에세이를 통해 최근 다시 논의되었다.
실버만은 (명확하게 주제를 전달하는 제목인 『돌들의 글쓰기The writing of stones』[3]와 같은) 곤충과 바위에 관한 카이유와의 글을 읽었다. [그 글에서 카이유와는] 곤충과 바위는 아름다운 외양을 통해서 관심을 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미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경우에는 (인간)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사물에 의해서 촉발되는 욕망의 교환을 통해 소통하며, 형태, 모양, 윤곽, 색 등과 같은 사물의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미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라도, 소통은 의미적이지 않고 신체적corporeal이다. 반면, 벤야민의 글은 두 개의 실재를 상정하고 비교한다. 만일 두개의 언어, 사물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구분하고, 사물의 언어는 소리가 없는 것mute, 인간의 언어는 제도화된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는 것immersed이라 했다.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벤야민의 글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슈타이얼은 벤야민의 인간의 언어를 국가와 민족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 관행, 즉 담론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번역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결정적으로 슈타이얼에게 그러한 번역은 예술 활동 안에서 이미지의 아쌍블라주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하나의 구조적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의 번역이었다.
이러한 사물의 언어는 이네스 도우약의 별난 직물 컬렉션처럼 ‘원래original’ 형식form과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혹은 작가의 수정을 거친 번역된 아쌍블라주와 같이 제도적으로institutionally 조작되어 기술된 대상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는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경우, 볼리비아의 지도, 독수리 간판, 기관총이나 북미 인디언들이 쓰던 피스 파이프와 같은 이미지들을 해석하고, 직접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색채의 밝기나 직조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 사물을 사물로서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사물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1] 카자 실버만은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수사학과 영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전문 분야로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 있으며, 철학에 근거한 시각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2] 『월드 스펙테이터: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World Spectators』, 카자 실버만 지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옮김,예경,2010
책의 제목인 ‘월드 스펙테이터’는 저자인 실버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한나 아렌트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아렌트는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외부세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시각의 주체, 그리고 사회에서 책임, 의무, 권리를 지니는 주체를 철학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세계 관찰자’라는 말을 지어냈다.
[3] 암석의 형태와 무늬에 대한 카이유와의 논의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는, 대리석을 실제 예술작품인 것처럼 틀을 만들고 거기에 틀을 만든 사람의 서명을 새겼던 19세기 중국의 관습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예술가는 발견의 순간에 매우 강렬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진 대상의 의도를 주관화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언어」, 『월드 스펙테이터』,p.206)
카이유와는『돌들의 글쓰기』의 한 부분에서 암석의 무늬를 “특별한 기호들(의 집합)”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그는 글들을 “읽음”으로써 그들이 보이고자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창조물과 사물을 보는 방법을 배운다고 주장한다 (ibid.,p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