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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볼리비아 티후아나쿠 Tihuanacu(Tiwanaku) 에서 열린 제2차 미국 조직 및 운동 회의 American Organisations and Movements 에서 아이마라 족(族) 군사지도자 바르톨리나 시사 바르가스 Bartolina Sisa Vargas 를 기리며 9월 5일이 공식적으로 국제 토착 여성의 날로 지정되었다.

1780년대 초 페루와 알토 페루(현 볼리비아)의 고지대에서 퀘추아 족과 아이마라 족 일당이 스페인 압제자들과 싸웠다. 바르톨리나 시사는 남편 투팍 카타리와 함께 1781년 라파스를 포위한 4만여 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토착민 봉기를 이끌었다. 시사는 184일 동안 유지되었던 포위 공격의 지휘관이었으며, 11개월 후 반란군이 진압되며 처형당했다. 초기부터 바르톨리나는 혁명의회에서 여성을 고려하게 하는 등 이 운동에 역동적인 공헌을 하였다. 민중 봉기는 오늘날 사회 운동의 목표, 토착권의 회복, 안데스 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들에 대한 공평한 재분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바르톨리나 시사는 말의 꼬리에 묶여 목에는 밧줄이 감기고, 벌거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감옥에서 나온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반란군 지휘관인 그녀의 시누이 그레고리아 아파자 Gregoria Apaza 는 당나귀에 얹혀 나온다. 그들 각자의 오른손에는 셉터 scepter 같은 지팡이 십자가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 가시관이 쓰여져 있다. 그들 앞에서 죄수들은 나뭇가지로 땅을 깨끗이 쓸고 있다. 바르톨리나와 그레고리아는 교수형이 행해지기 전까지 볼리비아 라파스의 주요 광장을 몇 바퀴씩 돌면서 그들을 인도 여왕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돌과 비웃음 속에 고통 받는다. 선고문에는 그들의 머리와 손이 지역의 도시들에서 [본보기로] 전시될 것이라고 쓰여 있다.

 

바르톨리나의 숙명fate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9월 5일은 그녀를 기억하기 위한 날일 뿐만 아니라 500년간의 탈식민화, 토지개혁, 사회정의 투쟁의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토착 여성들이 행했던 중요한indispensable 역할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날 볼리비아 농민 여성 바르톨리나 시사 전국 연맹 Bartolina Sisa National Federation of Bolivian Peasant Women (FNMCB-BS 또는 바르톨리나스 Bartolinas)은 힘있는 단체로 성장했다. 2010년 바르톨리나 지도자 닐다 코파 leader Nilda Copa 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 되었으며, 플뤼니얼 입법회 Plurinational Legislative Assembly 에는 여성대표자가 전체의 30%에 이르렀다. 더불어 전체 볼리비아 의회 의원 중 43%가 여성이다. 또한 현 정치 행정부는 여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예를 들어] 2006년과 2008년 사이에 정부는 농촌 여성들에게 10,300개의 부동산 소유권을 분배했다.

온두라스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서방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았던 2009년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 자신들의 토지를 보호하려 했던 마야인 12명과 31명의 노동조합원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된 바 있다. 이 쿠데타에는 섬유와 의류 분야에서 일하는 11만 명의 여성들이 참여했으며, 당시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미국의 ‘자유 무역’ 이자에 대항해 아메리카 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 Bolivarian Alternative for America 에 서명했던 마누엘 셀라야 Manuel Zelaya 정부에 맞선 쿠데타였다. 바르톨리나와는 달리 베르타 카세레스 Berta Cáceres 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토착민 출신의 환경주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사실이 2016년 그녀의 암살이나 2017년 딸의 목숨을 노리는 뻔뻔한 시도를 막지는 못했다. 정권의 테러 전략이나 노동자와 협상하기보다는 공장 문을 닫아버리는 섬유 기업들의 전략에도 불구하고 2015년과 2017년 캐나다 소유의 길단 Gildan 공장에서 9,000명의 여성들이 2년간의 투쟁 끝에 노조 결성권을 따냈다.



Llama Figure | 라마 피규어

울, 면, 식물섬유/ 추정 중후기/ 약 1000-1450 CE/ 찬 차이Chang Cay/ 출처 이베이, 2013. 오늘날까지 페루와 볼리비아 고원 원주민의 생존은 라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중요했을 뿐 아니라, 토착민들의 믿음의 체계에서 낙타류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사람들은 볼리비아 라마모(毛)가 스페인 양모보다 품질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십년에 걸쳐 식민지 이전 라마수의 10%만 남기고 몰살시켰다. 안데스의 양치기들은 무리에서 개별 동물들을 묘사할 수 있는 인구 분류법demotic taxonomy 을 개발했다. 이러한 계층적으로 무질서한 체계는 매우 유연하여 광범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물들은 수컷 혹은 암컷으로 구분될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생식이 가능한 동물은 생식이 불가능한 동물들과는 다른 성별을 가지는 것처럼, 다양한 젠더로 분류된다. 동물의 나이는 햇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방목된 목초의 질과 고도, 자손의 수, 질병, 치아의 상태, 양모의 질과 양, 동물이 짊어질 수 있는 운반량 등 다른 기타 영향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동물 이름의 첫 부분은 라마인지 알파카인지 나타낸다. 그 다음은 색상의 분포 또는 패턴의 종류를 나타내며, 성, 나이, 양모의 품질이 그 다음에 표시된다. 동물이 만약 서로 유사한 경우, 설명이 추가된다. 동물의 양모가 밝은 색상이 우세한 경우, 일반적으로 알카alqa라고 부른다. 알카는 그 다양성에 따라 53개의 용어와 네 개의 어두운 기본 색상을 조합으로 총 212개의 조합이 가능하다. 기본 색상은 19개의 다른 명도를 가지며, 4028개의 가능한 알카 품종이 있다. 성별이 참고로 추가된다면, 동물의 젠더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이기 때문에, 그 수는 3배가 되어 12,084개의 품종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여기에] 나이 요소가 추가되면, 양치기들은 동물을 식별할 수 있는 20,000개가 넘는 상세한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수컷 라마와 알파카는 들판 사이로 그리고 때로는 마을 사이를 오가며 짐을 운반한다. 알파카와 라마 가죽은 매트리스, 베개로, 양모는 의류, 운반용 직물, 담요, 밧줄 및 슬링sling으로 사용된다.

알파카 털은 흰색, 갈색, 회색, 검은 색의 자연스러운 색상이나 그것을 조합한 직물로 만들어지고, 실로 만들어지기 전에 염색되기도 한다. 4 년 이상 자란 알파카의 가슴털은 슬링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알파카 고기는 신선하게 조리되거나 소금에 절여서 차르키ch’arki[1]로 보존된다. 알파카의 각 부분은 소비되거나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알파카 피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준비된다. 힘줄은 현악기의 줄뿐만 아니라 바느질에도 사용되며 악기를 함께 묶는 데 사용된다. 간은 튀겨서, 폐는 야채와 고추와 함께 먹고, 머리는 육수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신들에게 바치는 주요 성분인 동물성 지방으로는 양초를 만든다. 뼈는 직조에 사용되는 빗 모양의 도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배설물은 들판을 비옥하게 하고 햇볕에 쬐면 요리용 연료 역할을 한다.

푸노Puno[2] 양치기들 사이에서 번개에 맞아 죽은 동물들은 인간을 매장하는 의식과 동일한 의식을 치르고, 8 일 후에 그들의 혼령이 떠날 때 또 다른 의식을 치른다.

[1] 차르키는 육류를 소금에 절여 말린 식품이다. 남아메리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휴대 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현대에 말린 육류를 지칭하는 ‘저키’라는 말은 ’차르키‘에서 유래했다. 차르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2] 페루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푸노 주의 주도이다.



Black 블랙

“‘저희가’” 라며, 완벽하진 않아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 나무들로 우리가 ‘배’라고 부르는 걸 만들겠습니다. 남는 목재로는 ‘종이’를 만드는 법을 보여드리죠. 이 ‘종이’위에는 (우리가 일단 출항을 하면) 어떻게 ‘쓰는’지 (불탄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보여드리죠. 만약 저희보다 더 잘 하신다면 저희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겠군요.”

 

근대 그리스에서 자나 깨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미망인의 그 ‘전통적인’ 드레스는 가부장제 사회 억압아래에서 금욕 중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애플Apple의 맥Mac 제품으로 대표하는 현대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말년에 공적 옷차림으로 검은색을 선택했다. 초기 사진에서는 그가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후 수도사와 같은 폴로 넥polo-neck 셔츠로 [복장이] 변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15세기 초반에 얀 반 에이크Jan van Eyke가 그린 룩카Lucca[1]지방 상인 지오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의 계보를 잇는다. 아르놀피니는 상인의 품위와 충성심의 상징인 검은 비버 모피 모자와 까만 모피 드레스, 검은 스타킹과 신발 차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의 전환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공존할 수도 있다. 동시대 세계의 잡스와 더불어 고딕하위문화 Gothic Sub-culture의 검은 옷, 화장과 창백한 얼굴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악마와의 이런 협업은 훨씬 전부터 있어왔고 이 문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낭만주의 속에서 굴절되었고 뱀파이어 장르 영화와 텔레비전 쇼에서 독특한 재 유행을 만들어냈다. 16세기에 여성이 악마 숭배로 구속되는 사례는 웃어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의 사형집행인은 주로 붉은색을 입었는데 옷장엔 까만 옷을 넣어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검은색은 긍정적인 색이었다. 나일Nile강에서 내려온 그 모든 검은빛 모래 진흙과 대지의 비옥함의 상징이며 죽은 이들이 내세(來世)로 향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색이었다. 그리스 세계에선 내세-저승에 대한 관념이 변하면서 검은색이 부정적인 의미를 띄게 되었다. 태양과 빛과 생동하는 감각 세계의 하늘이 없는 저승Hades[2]은 따분하고 어둡다. 기독교의 악마 개념도 사티로스satyr[3]의 도상학(圖像學,iconography)에서 비롯했으며 서기 1000년 전후의 악마나 악(惡)에 대한 개념 역시 그 관념에 검은색을 더했다. 하지만 200년 후 검은색은  “도시 귀족들과 시 공무원 혹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옷을 선택하는 색깔로, 품위와 절개를 상징하게 되었다. 14세기 중반에는 염색 기술의 발달이 진행중이었고 염색업자들은 검은 피부의 성 마우리시오Saint Maurice[4]의 인기를 얻었고 염색업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변했다. “염색업자들은 모리스 성인을 자랑스러워 했고, 회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행진 퍼포먼스로 성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또한 예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린 예수가 티베리아스Tiberias지방 염색소의 견습생이 되어 색깔들을 만드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였다.

매염제(媒染劑)에 더 많이 의지하여 발전된 기술은 좀 더 제대로  된 검은색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기술과 더불어 귀족을 제외한 모두에겐 특정 색상 옷을 금지하는 사치 금지령은 1360-1380년대 사이의 상인들과 금융계 남성들이 검은색 옷을 입게 하는데 공헌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모습에 필요한 엄격함을 부여해서, 색공포증chromophobia과 신뢰감을 주는 금욕적 모습을 추구하는 개신교 인들의 심미적 방식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게 했을 것이다.

검은색은 수 세기 동안 그런 근엄함을 표현하는 색으로서 회색과 경쟁하고 있었다. 문명인은 “비문명적인 국가와 아이들”이 입는 밝은 색상을 싫어하며, 그 대신 남성은 검은색 여성은 하얀색을 입는다고 괴테는 말한다. 비판적인 형용사‘야한garish’은 밝게 염색된 옷이 음탕한vulgar 것이라는 개념을 영구화 했다. 17세기 브라질 사람들은 정반대로 이런 이야기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조적인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에게 영국식 옷은 “너무 음울한 옷 같습니다. 이런 우울한 옷은 싫습니다. 여기에는 퀘이커교Quakers[5]교인들도 없어요. 11월의 영국에나 어울릴 침울한 색깔들은 원치 않습니다”[고 말했다.]
때로는 이러한 경향이 미신적이라 여겨질 수 있다. 개신교도 자본가 헨리 포드Henry Ford[6]가 그의 고객들에게 “검은색이기만 하다면” 어떤 색의 차든 가질 수 있다고 했듯이, 혹은 영국 판사들이 사형 선고를 내릴 때처럼 참혹한 의식들의 대표자가 자신의 가발 위에 작은 검은색 모자를 얹은 것과 같이, 창조적인  전문 계급과 그 지식인들의 시대는 물론 스티브 잡스가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인 이 시대엔 검은색이 ‘쿨하다cool’는 개념과 함께 새로운 방식의 사제직을 선택하는 색으로 변모하며 생명력을 대여받았다. 이런 진지한 사람들은 예술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만, 분명하고 꾸밈없으며 정갈한 사람이기도 하다.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블랙을 더러움과는 거리가 먼 색이라고 여겼듯 검은색은 선명하며 명쾌하다. 최근 발명된, 반타 블랙Vanta Black으로 불리는 가장 검은 검은색은 거의 아무 빛도 반사하지 않는 색인데 스텔스stealth [7]위성에 사용되는 것으로 특허를 받았다. 현재 방위 산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있는 혁신들도 이 예를 따르고 있다. 나노 시스템Nany Systems 제작자들은 색채 효과로 저명한 영국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에게 이 색의 사용 독점권을 제공하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계약을 맺었다. 검은색의 부상은 수퍼 쿨super-cool하다.

[1] 룩카Lucca : 이탈리아 서북부, 플로렌스 지방 서쪽.

[2] 하데스Hades: 그리스신화에서 죽은 자들의 신이다. 여기에선 죽은 자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3]사티로스satyr;satyros: 그리스신화 속 반인반수 숲의 정령이며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호색가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들 사이에 진행되는 익살스러운 사티로스극satyros play은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

[4] 성 마우리시오Saint Maurice: 성 마우리티우스, 성 모리스로도 불린다. 로마 출신 군인이었으며 우상숭배를 거부하여 처형당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오토1세가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셨으며, 독일계 상인 조합인 검은머리길드(The brotherhood of bleackheads; Bruderschaft der Schwarzhäupter)의 수호성인이다.

[5] 퀘이커Quakers: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6] 헨리 포드 Henry Ford(1863,7,30~1947,4,7): 미국의 자동차 포드Ford 사의 창설자.

[7] 스텔스Stealth: 항공기나 유도탄 등을 제작할 때, 레이더 전파를 흡수하는 형상이나 자재 또는 도장(塗裝) 따위를 사용하는 기술로 항공기나 미사일이 적의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하는 군사과학기술이다.

 Black                                                       37

오늘날까지 페루와 볼리비아 고원 원주민의 생존은 라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중요했을 뿐 아니라, 토착민들의 믿음의 체계에서 낙타류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16세기 스페인사람들은 볼리비아 라마모(毛)가 스페인 양모보다 품질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십년에 걸쳐 식민지 이전 라마수의 10%만 남기고 몰살시켰다. 안데스의 양치기들은 무리에서 개별 동물들을 묘사할 수 있는 종(種)분류법demotic taxonomy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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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of refinement, Goethe says, disliked bright colours, which were for “uncivilized nations and children”, instead wearing black for men. Despite some times being portrayed as devilish, it now signifies the cool self-discipline of the wearer.

괴테가 말하기를, 교양있는 사람들은 “비문명적인 국가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밝은 색상을 싫어하며, 대신 남성들은 검은색 옷을 입는다고 했다. 한 때는 검은 옷을 입는 것이 악마적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지금은  냉철한 자기 수양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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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ptember 5th was designated 1983 in Bolivia as International Indigenous Women’s Day in honour of Aymarán military leader Bartolina Sisa Vargas and of the indispensable role played by generations of indigenous women in the 500-year struggle for decolonisation.

1983년 볼리비아에서는 9월 5일을 국제토착여성의날 International Indigenous Women’s Day 로 지정하여 아얄라 Aymarán 군 지도자 바르톨리나 시사 바르가스 Bartolina Sisa Vargas 에게 경의를 표하고, 500년간의 탈식민화 투쟁에서 토착 여성들이 했던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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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understand is that culture belongs to the person who lives it. It doesn’t belong to he who stopped living. I see that there are many cultures, or many customs, that have disappeared, but, nevertheless, they say, it is ours but they don’t live it anymore. They’ve changed their ways of celebrating, their clothing, everything has changed. And where they have their past, they only have a museum, a doll dressed up, that is like that. But not in Taquile, it is still alive, it is walking. Well, Taquile in this case would be like a living museum.

내가 이해하는 바로 문화는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속하며, 문화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은 문화와 관습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라진] 문화나 관습이 자신들의 것이라 말한다. 그들이 축하하는 방식, 옷, 모든 것이 바뀌었다. 유일하게 그들의 과거가 존재하는 곳은 박물관이나 전통 옷을 입은 인형들에서다.  그러나 타킬레Taquile에서는 문화가 여전히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다. 타킬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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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 카네도 파티뇨 | Beatriz Canedo Patiño

이 직물은 인도네시아의 자티왕이Jatiwangi 주변 지역에서 여성 협동조합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제조되는 기와를 보여준다. 여성들은 정밀한 작업을 함으로써 남성들보다 더 수입이 많으며, 모두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점토의 채굴은 벼농사와 함께 진행된다. 바틱batik[1]은 이 지역의 전통 공예품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모두가 그 천을 입고 있다.

“나는 볼리비아인입니다. 그러나 수 년간 뉴욕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뉴욕은 그 물동량(物動量) 때문에 파리나 밀라노를 제치고 세계 패션의 중심지가 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볼리비아에서 회사를 운영 중인데, 나는 디자인을 하면서 다른 재봉사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든 옷들이 ‘메이드 인 볼리비아 Made in Bolivia ’라벨로 나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귀향은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기자가 “라파스에서 이런 멋진 여자가 뭘 하고 있을까”와 비슷한 제목으로 나를 인터뷰했던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왜 뉴욕을 두고?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의 핵심은 경쟁력 있는 가격입니다. 나는 MBA를 취득한 사람이 아니라 디자이너이지만, 토론토에서 500벌의 의류 주문을 받았을 때 자리에 앉아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곳의 재봉사들은 정규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정교한 작업을 하는데 문제는 없었습니다.  우스운 것은 이런 훌륭한 재단의 전통이 영국인들이 철도를 건설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때 몇몇 영국인 재봉사들이 함께 들어왔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이 일과 잘 맞는 이유는 내가 기술디자이너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이 때문에 아마도 나는 항상 미스터 카네도 Mr. Canedo라는 이름으로 우편물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단지 그들은 의류 사업 뒤에 여자라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내가 귀국했을 때, 우리의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 Evo Morales의 팀이 방문하였고 그들은 내가 그의 대통령 취임식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기를 원했습니다. 글쎄요, 그들은 분명히 내 명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내 말은,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많은 유명인들에게 옷을 입혀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가 알파카 실로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류층 볼리비아인들은 알파카를 입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에게 알파카는 하녀나 집사가 입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나에게 [대통령이 취임식에 입을] 옷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500년 만에 [선출된] 첫번째 원주민 대통령인 그가 정말 멋있게 보이길 바랬습니다. 비록, 진짜 볼리비아 스타일대로 그들이 매우 늦게 그 일을 넘겨줬기 때문에 나에게는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나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요구한 것은 대통령이 넥타이를 매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 점은 나와는 상관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대통령은 자신의 문화, 아이마라Aymará와 동일시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퀘추아Quechua사람이 아니라 아이마라 사람입니다. 나는 그 점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냥 손쉽게 아르마니 정장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고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출장으로 매우 바빴기때문에 부통령인 알바로 Álvaro가 와서 나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고, 나중에는  내가 만든 시안들을 보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정장이 알파카로 만들어질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국기가 빨강, 노랑, 초록색으로 충분히 요란스럽기 때문에 정장의 색깔은 은은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장에 아이마라의 문양들을 수놓기로 했습니다. 는 이 일에 매우 진지하게 임했고 이곳에 오거나 전화를 거는 이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취임식을 열흘 앞두고도 나는 그 문양들에 대한 모든 조사를 직접 다 했는데, 그게 내가 일 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까다롭다고 부르지만, 그게 그저 평범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내가 대통령을 위해 옷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언론에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전세계의 언론들이 대통령의 취임식옷을 만드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때로는] 모욕적인 태도도 보이며, 돈을 제안하고, 카메라를 가져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나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믿기 어렵게도, 그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밖에 있는 나무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물론 취임 후에는 더 이상 그들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지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나는 모든 낙타류 섬유에 대한 연구와 심포지엄과 더불어 그 주제의 국제 전문가들과 교류하고 있었으며, 그 섬유들을 내 디자인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초호화 섬유이자 가장 가는 섬유인 비쿠냐vicuña[2]는 캐시미어보다 훨씬 더 질이 좋고 게다가 훨씬 예쁜데, 캐시미어 염소가 아주 못생긴 것에 비해 비쿠냐는 매우 우아한 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비쿠냐를 처음으로 사용한 디자이너입니다. 나는 일부 말도 안되는 바보같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불구하고 비쿠냐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 말인 즉슨, 우리는 낙타과의 그 동물을 죽이지는 않으면서도 비쿠냐의 털은 깎을 수 있으며, 이는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농민들campesionos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 볼리비아에서는 비쿠냐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데, 칠레에서 열린 지난 심포지엄에서 나와 우리 회사만이 이를 디자인하고 제조할 수 있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것은 진지한 작업입니다. 이는 신성한 직물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우리가 진지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 말은, 최근 인터뷰를 하면서 오바마 부인에게 남편의 취임식 때 무엇을 입을지를 어떻게 조언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산타크루즈의 소위 수준 높은 신문은 나 외에도 몇몇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는데, 내가 한 말을 바탕으로 시안을 그렸고, 이에 나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이것은 나의 시안이 아닙니다. 머리는 너무 크게 그렸고, 물론 우리는 불쌍한 오바마 부인이 엉덩이가 크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날에는 이를 절대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방식! 내 말은, 코트의 길이는 드레스와 같아야 하는데, 그럼 그녀는 눈 속에서 지갑을 어떻게 들고 다닐 것입니까? 그녀는 얼어붙을 것이고, 게다가 알다시피 여왕과 공주들은 뒤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돈을 지불해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결코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화가 났지만 산타크루즈 언론과의 싸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인터뷰어는 상당히 멍청했습니다. 나는 오바마 부인이 세련되고 우아해 보여야 하기 때문에 스카프를 두르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보석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카라카스 Caracas[3]에서와 약간 비슷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피부, 피부, 피부; 보석, 보석, 보석 등 모든 것을 지나치게 과장합니다. 이에 첫 번째로 내가 말한 것은 “매우, 매우 작은 보석” 이었는데, 특히 지금 영부인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등장하는 것은 세계 경제 위기 상황에 비해 너무 화려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 바틱 batik: 인도네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염색의 독특한 기하학적인 무늬나 천의 명칭

[2] 비쿠냐vicuña: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평야 고지에서 서식하는 낙타과의 동물, 비쿠냐의 털은 캐시미어를 능가하는 최고급의 섬유이자 2-3년에 한 번씩만 털깎기가 가능한 희귀한 섬유이다.

[3] 카라카스 Caracas: 베네수엘라의 수도.



1972

노동조합trade union으로 설립된 인도의 자영업자 여성회(SEWA)는 917년 간디가 주도한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영감을 얻은 아나수야 사라바이Anasuya Sarabhai[1]라는 여성에 의해 1920년에 설립된 섬유 노동 조합에서 출발했다. 조합의 여성회는 1954년 제분소 노동자들의 아내와 딸을 연수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결성되었지만, 이것이 의류 생산의 전반적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착취를 당한 일부 자영업자 ‘가정주부’ 여성 재단사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노조를 촉진한 또 다른 그룹의 여성들은 거리에서 살면서 아마다바드[2]의 옷 시장에서 수레 끄는 일을 하는 이민 여성들이자 도매와 소매 시장 사이에 많은 옷을 나르는 ‘헤드 로더’[3]들이었다. 포목 도매상들을 무색하게 한 그들의 성공은 중고 의류 상인으로 일하는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자영업자들도 자체 노동조합을 가질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을 위해 투쟁하게 했으며, 마침내 그것이 인정되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섬유와 의류, 새 것과 중고품이 표준화된 금속 컨테이너를 타고 들어오고 나간다. 칸들라 Kandla[4]는 주요 중고품 환적 항구이다. 컨테이너에는 바다나 항구와 배 안에서 그들의 행방을 즉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RFID 태그가 붙어있다. 대다수의 항구에서는 사람의 도움 없이 컴퓨터 정보가 시키는 대로 작동하는 기중기들에 의해 [컨테이너가] 어디로 옮겨져야 하는지가 지시되고 조정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차례대로 도착하는 평평한 대형 화물차가 컨테이너를 들어 올리는 순서와 일치하도록 동기화된다. 오늘날의 로봇화 된 물류 시스템은 세계적인 생산 체인과 빠른 패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옷과 직물이 실제로 팔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울 동대문과 상파울루 시내와 같은 도매 소매 시장에서는 물류는 계속해서 손수레, 50cc 자전거 또는 자신의 어깨에 의지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라파스[5]에서는 인간 적재 운반선인 아파라피타스 aparapitas[6]가 시장 구역의 경계를 훨씬 넘어 운송한다. 이러한 경우 비록 공식적인 결합이 없더라도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는 관례에 근거한 임시 조합이 있다. [그러나] 스페인 령 세우타[7]와 멜리야[8]를 거쳐 모로코와 등지로 오가며 제도화된 ‘밀반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쟁세계에서는 그러한 임시조합이 없다. 이곳 여성들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촘촘한 복도같은 길을 다니며 최대 100kg에 달하는 짐을 나르고 있다. 한 여성이 다큐멘터리 제작진으로부터 당신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나에게 미래가 없을 때 어떻게 꿈을 가질 수 있느냐고 대답했다. 이런 맥락에서 SEWA의 존재와 수명은 특별한 것이다.

[1] 아나수야 사라바이(Anasuya Sarabhai)는 여성 노동 운동의 선구자이었고 1920 년에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섬유 노동자 연합을 설립했습니다. 

[2] 아마다바드(Ahmedabad)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351만 5,361명이다. 

[3] Head loader은 머리에 짐을 이고 나르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

[4] 칸들라(Kandla)는 Gandhidham시 근처의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Kutch District에있는 항구입니다. 쿠치 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안의 주요 항구 중 하나입니다.

[5] 라파즈La Paz는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이다. 1548년 에스파냐의 알론소 데 멘도사 선장이 건설했다.

[6] 아파라피타스(aparapita)는 볼리비아 시장에서 서로 다른 물품을 등에 업고 운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7] 세우타Seuta,Ceuta는 아프리카 모로코 북부, 지브롤터 해협 연안에 위치한 스페인의 고립 영토이자 자치 도시이다. 

[8] 멜리Mellia는 스페인의 자치 도시. 세우타와 마찬가지로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Jaket 자켓

아크릴 섬유 재질의 자수; 2009년 라파스에서 구입. 이 자수는 2009년 볼리비아 혁명 정부 시기에 판매되었다. 자켓에 수놓아져 있는,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Che Guevara[1] 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전세계의 의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산주의 영웅의 이 얼굴은 “노스탤지어의 상품화된 표현”이라고 불리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20세기 여러 독재 집권기 중 하나가 진행중이던 1987년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CIA(미국중앙정보부) 배후의 암살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거의 모든 암살사건에는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히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 196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사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억압과 대량학살, 고문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여기에는] 미국의 훈련과 다양한 지원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런 지점에서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2] 대통령의 당선은 혁신적이었으며, 모랄레스 정권이 2009년 2월에 설립한 새 국가 헌법 또한 그러했다. 대다수의 볼리비아 시민들이 한달이나 먼저 헌법 개정 총선거에 표를 행사했다. 새로운 헌법은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혁신적인 헌법이라 주장했고, 법령 전문(前文)에서 지난날 볼리비아 물 전쟁Water War[3]을 포함한 모든 고군분투와 과거 순교자들의 노력을 인정했다. 체 게바라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미지가 당시 급속도로 확산되었던 것은 대중이 체 게바라 역시 순교자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새 헌법은 볼리비아의 다민족적plurinational 성격과 생태계에 대한 책임 이 두가지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 법률, 경제, 문화와 언어의 다원주의를 선언하며, 헌법초안을 아이마라어, 케추아어와 스페인어로 작성함으로써 그것을 실현하였다. 그 외에도 국내에서 사용하는 다른 많은 언어들도 열거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나아가 “환경 시스템과 지역 거주민의 공동체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 인프라와 개발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서 자본주의 세계를 분노하게 하기도 했다.

[1]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6.14~1967.10.9: 본명Ernesto Guevara de la Serna.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정치가이자 혁명가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만나 쿠바 혁명Cuban Revolution에 가담했고 라틴아메리카 민중혁명을 위해 싸우다 볼리비아에서 사망하였다.

[2]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볼리비아의 전 대통령이다. 2005년 취임해 2019년까지 14년이라는 최장 집권 기록을 남겼으며 최초의 볼리비아 원주민(아이마라족)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다. 천연가스 등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해서 재정수입을 확충하고, 복지 정책을 시행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빈곤 해소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개헌을 하여 4선 연임을 시도하였고 2019년 11월 10일 부정선거 논란으로 시위가 일어나자 사임한 뒤 멕시코로 망명했다.

[3] 볼리비아 물전쟁Water War (Guerra del agua en cochabamba): 볼리비아는 1980년대 외환위기이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수도 민영화를 받아들였다. 미국의 건설 기업인 벡텔Bechtel이 지배하고 있는 기업 아구아스Aguas del Tunari가 상하수도 운영권을 갖게 되었고 코차밤바Cochabamba 시의 물 공급을 독점하며 물 값을 대폭 올렸으며 빗물, 농업용수사용에도 요금을 매겼다. 이에 2001년 시민들이 민영화 철폐를 주장하며 투쟁했고 4월 경 볼리비아 정부는 위 기업과의 계약을 폐기했다.



Linen 리넨

방적실은 15세기에서 17세기 후반까지 독일 마을에서 원사(原絲) 생산을 위한 중요한 중심지였다. 여성이 우위에 있다고 인식된 세계에서는 성적 문란과 무질서가 만연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무자비함과 용감함을 표현하기 위해 긴 기장의 리넨 셔츠를 입었다.” 원사와 그 원사로 짠 옷감인 리넨의 원 재료인 아마(亞麻)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직물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기원전 8000년의 아마 조각들이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수천 년 동안 [아마 생산은] 자급자족하는 ‘소작농’ 경제인 카우프 Kauf 라는 체제의 일부였는데, 카우프는 ‘새로운 세계 New World’의 노예들에게 입힐 옷을 만들기 위한 ‘오스나브뤼크 Osnabruck’ 천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만들어낸 노동의 분업과 함께 ‘반출 putting out’ 시스템인 페어라그 Verlag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 자율성을 훼손하고 철저한 자본주의 규율이 되기 위해 체계적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세계 최대의 리넨 생산국이 된 아일랜드 북부 지방 은 기술이 발전하고 공장체제로 전환하던 19세기 이전부터 변혁의 실험실과도 같았다. 16세기 말, 아일랜드를 방문한 한 영국 여행자는 원주민의 풍요로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일랜드 원주민들은 샤프란으로 염색한 30엘에서 40엘 길이의 셔츠를 입었다.”[1] 엘은 1야드[2]를 조금 넘었다. 18세기 중반까지 리처드 콕스 경 같은 ‘기업가적’ 식민지 지주들은 리넨을 사업화 하기 위해 사회 통제 시스템을 정교하게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토착인들의 달력이나 의례, 축일 등을 지키지 않게 되었고, 생산자를 위한 풍요 개념 역시 사라져 갔다. 하나의 예로 노동절은 ‘포상’의 날이 되어 공개적으로 보상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는 지역 주민들을 그들의 “일정하지 않은 기술수준”과 근면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노동인력actor로 만들었고,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 크게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부리는 술수machination도 경계해야 했다. 콕스는 그것이 “가게에서 쥐를 기르고 아끼는” 치즈장수와 같은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식민지적 사고방식은 평점제credit에 의해, 그리고 [평점을 받게 될] 잠정적 수혜자들이 아마나 린넨 생산을 위한“노동에 헌신”할 것이라는 생각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조각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영국이 식민지 의 토지를 횡령하자, 여전히 성장가능성이 있었음에도‘새로운 땅’의 감자 수입[4]때문에 더 의존적이게 된 아일랜드 농촌 인구가 만들어졌다. 1662년 토지 횡령은 협조적이지 않은 직공들의 아마와 직물 몰수, 잉글랜드에서 온 개신교 이민자들에게 주어지는 법적 특권, 아일랜드산 양모에 대한 큰 금액의 수출세 부과에 의한 양모 산업의 파멸, [그리고] 리넨에 대한 관세 보호에 의해 더욱 가속되었다. 이 모든 일은 그 유명한 위그노 망명자이자 아일랜드 리넨 산업을 창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리넨 전문가 루이 크롬멜린 Louis Crommelin이 도착하기 이전에 일어났다. 이 때부터 땅 없는 부랑자에 대한 복지(자비)는 해로운 것으로 묘사되고, 리넨을 생산할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악랄한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또한 여기에는 생산과 관련된 젠더 엔지니어링을 포함되었다.

방적은 병목현상처럼 보였다. 한 명의 방직공이 작업하기 위해서는 8명의 방적공이 필요했다. 리차드 콕스 경과 같은 초기자본주의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이  긴 섬유질을 파쇄하지 않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마 생산의 마지막 단계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작업을 하도록 했다. 남성들이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 “인위적인 나약함 artificial weakness을 배울” 필요는 없었다. 방적의 경우, 여성 노동력을 어디에서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는 쉽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홀란트에서는 혼자 있는 여성을 평온한 미덕의 전형으로 재현하는 반면 무리 지어 있는 여성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거칠게 표현하였다. 아일랜드에서는 가정에 있는 젊은 여성들을 ‘제멋대로’인 것으로 여겼고, 그들은 게을러서 ‘울타리에 구멍을 내고, 과수원에서 도둑질을 하거나 아버지를 거지로 만든다’고 여길 정도 정도였다. 반면에 이웃들이 빛과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한 장소에 모여 갖는 수작업 방적 ‘모임 bees’을 갖는 것은 큰 즐거움과 관련이 있었으며, 개신교와 카톨릭의 위계질서에서 볼 때 여성이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 다니는 것은 대단한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이상적인 해결책은 여성들이 성과를 내기 위해 분투했던 방적 기관에 있었다. 각 여성의 노동의 집약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소였던 작업장과 고아원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공간들은 공장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공장 규율을 적용하고 있었으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에서는 1811년에도  여전히 손으로 리넨 원사를 방적할 수 있었고, 아일랜드 북구에서는 [손으로 짠 리넨 원사가] 잉글랜드의 기계에 의해 생산된 똑 같은 재료들보다도 더 싸게 팔릴 수 있었다.

[1]  샤프론으로 염색된 아일랜드 셔츠

[2] 1야드는 0.9144 미터에 해당한다.

[3] Cox’s promotion scheme included an overhaul of the ritual calendar; he discourages his tenants from celebrating their traditional feast days and transformed May Day into “the joyous season of Determining the Premiums”(1749:32) Then, a full assembly gathered for the applauses and demerits that each deserved. In determining who got what, firsthand “Acquaintance” and “Observation” were essential, for it was cox’s view that the “Undertaker must attend personally the growth of the Undertaking” (1749:48) He should not “receive Reports from others; for those will often be partial, though Love, Malice, or Envy…”  from Cloth & Human Experience

[4] 새로운 땅. 감자도입

  Jaket 자켓                                         25 

자켓에 수놓아져 있는,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Che Guevara[1] 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전세계의 의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산주의 영웅의 이 얼굴은 “노스탤지어의 상품화된 표현”이라고 불리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20세기 여러 독재 집권기 중 하나가 진행중이던 1987년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CIA(미국중앙정보부) 배후의 암살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거의 모든 암살사건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히 미국의 배후를 받았다. 196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사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선 억압과 대량학살과 고문이 비일비재 했고 미국의 훈련과 다양한 지원이 연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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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esentations in Holland had the woman at home spinning as the epitome of tranquil virtue, whereas women in a group were too sensual and wild. In Ireland young women in the home were seen as ‘unruly’, their idleness leading to “tearing hedges, robbing orchards or beggaring their fathers”. 
English proto-capitalists instituted labour discipline.

홀란드에서는 혼자 있는 여성을 평온한 미덕의 전형으로 재현되는 반면 무리 지어 있는 여성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거칠게 표현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가정에 있는 젊은 여성들을 ‘제멋대로’라고 여겼고, 그들은 게을러서 “울타리에 구멍을 내고, 과수원에서 도둑질을 하거나 아버지를 거지로 만든다’는 이야기할 정도였다.
영국의 초기 자본주의자proto-capitalists 들은 노동기강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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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lf-Employed Women’s Association of India was founded as a trade union. It was kick-started by migrant women working as cart-pullers in Ahmedabad’s cloth market, who were then living on the streets, and ‘head-loaders’, women carrying loads of clothes between the wholesale and retail markets.

인도 자영업 여성 협회는 노동조합으로 설립되었다. 이를 촉진한 것은 길거리에 살면서 아마다바드의 옷 시장에서 수레 끄는 일을 하던 이주민 여성들이자 도매와 소매 시장 사이에 많은 옷을 나르는 ‘헤드 로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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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obviously they knew my reputation, I mean, I don’t want to brag but I’ve dressed a lot of famous people. Maybe also, they knew I’d done a lot of my work with alpaca yarn, even though Bolivians themselves, the upper class, so to speak, they wouldn’t wear it; for them it was for their maid or their butler to wear alpaca.

글쎄, 분명히 그들은 내 명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말은,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많은 유명인들에게 옷을 입혀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가 알파카 실로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류층 볼리비아인들은 알파카를 입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에게 알파카는 하녀나 집사가 입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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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Sheikh | 사이먼 셰이크

칼라스니코프 소총을 묘사한 아프간 양탄자.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레인에서 구입. 앤서니 다우니 박사의 소장품 제공

대상object과의 소통에 관해서: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체로 그것은 미적 대상이거나 문화적 가공물이며,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을 걸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아주 흥미롭고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만일 그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지 않거나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을 경우에 수용자인 나에게는 [그것이]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의미나 감정affect의 전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대상이 말을 건다고 전제하게 되는 언어는 그렇게 쉽게 식별되거나 분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목소리의 대행자나 저자가 있는 경우와 같이 의도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수수께끼의 중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대상이 주체의 응시gaze에 의해 활성화되는 경우인데, 이 때에는 소통이 가능하다. 둘째, 그러한 소통은 친숙하던 낯설던 간에 일종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독 및 번역이 가능하다.

우선, 먼저 의도하는 대상의 지위는 자연적이던 문화적이던 그것의 기원과 관련이 있으며, 후자인 문화적 대상의 경우에는 항상 재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재적인 사용 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은 다소간의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모양, 소리, 색깔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론 문화적 맥락과 판독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어느 정도 매력적이기도 하고, 불분명할 때도 있으며, 눈에 보이고 해독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상이 도드라져 보이게 하거나 배경에 묻혀 보이게 하는 시각적 외양appearance이나 정체성identity을 대상이 의도한다고 볼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는 어떤 대상이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단적인 믿음에서부터 기독교적 범신론을 넘어서는 종교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모더니즘의 난제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이러한 견해는 놀랍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을 문화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보편적인 추상언어라는 모더니즘적 전술은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우리가 이처럼 권위있는 방법authored policy의 변방에서, [다시 말해] 모더니즘적 사유의 가장자리에서 의도하는 대상에 대한 이론화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주변부에서 볼 때에만 전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모호한 텍스트가 바로 그 가장자리에서 동시대 저자들과 조응하게 되기 때문인 듯하다.

[여기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나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 같은 저자들이 주체subject에 대해서 언급한 글을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다른 접근법과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물의 언어라고 일컫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1]은 계획적인 제목이 붙은 『월드 스펙테이터World Spectators[2]이라는 저서에서 ‘사물의 언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물이 어떻게 소통하고 상대방의 시선을 원하는지를 상술하며, 의도하는 사물들과 곤충들에 대해 서술한 카이유와의 이론을 정확히 그려냈다. 벤야민은 사물 소통 개념에 대해 텍스트를 썼는데 이는 정확히 「사물의 언어The language of Things」라는 제목을 가진 히토 슈타이얼의 에세이를 통해 최근 다시 논의되었다.

실버만은 (명확하게 주제를 전달하는 제목인 『돌들의 글쓰기The writing of stones』[3]와 같은) 곤충과 바위에 관한 카이유와의 글을 읽었다. [그 글에서 카이유와는] 곤충과 바위는 아름다운 외양을 통해서 관심을 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미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경우에는 (인간)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사물에 의해서 촉발되는 욕망의 교환을 통해 소통하며, 형태, 모양, 윤곽, 색 등과 같은 사물의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미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라도, 소통은 의미적이지 않고 신체적corporeal이다. 반면, 벤야민의 글은 두 개의 실재를 상정하고 비교한다. 만일 두개의 언어, 사물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구분하고, 사물의 언어는 소리가 없는 것mute, 인간의 언어는 제도화된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는 것immersed이라 했다.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벤야민의 글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슈타이얼은 벤야민의 인간의 언어를 국가와 민족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 관행, 즉 담론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번역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결정적으로 슈타이얼에게 그러한 번역은 예술 활동 안에서 이미지의 아쌍블라주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하나의 구조적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의 번역이었다.

이러한 사물의 언어는 이네스 도우약의 별난 직물 컬렉션처럼 ‘원래original’ 형식form과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혹은 작가의 수정을 거친 번역된 아쌍블라주와 같이 제도적으로institutionally 조작되어 기술된 대상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는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경우, 볼리비아의 지도, 독수리 간판, 기관총이나 북미 인디언들이 쓰던 피스 파이프와 같은 이미지들을 해석하고, 직접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색채의 밝기나 직조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 사물을 사물로서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사물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1] 카자 실버만은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수사학과 영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전문 분야로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 있으며, 철학에 근거한 시각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2] 『월드 스펙테이터: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World Spectators』, 카자 실버만 지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옮김,예경,2010

책의 제목인 ‘월드 스펙테이터’는 저자인 실버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한나 아렌트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아렌트는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외부세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시각의 주체, 그리고 사회에서 책임, 의무, 권리를 지니는 주체를 철학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세계 관찰자’라는 말을 지어냈다.

[3] 암석의 형태와 무늬에 대한 카이유와의 논의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는, 대리석을 실제 예술작품인 것처럼 틀을 만들고 거기에 틀을 만든 사람의 서명을 새겼던 19세기 중국의 관습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예술가는 발견의 순간에 매우 강렬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진 대상의 의도를 주관화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언어」, 『월드 스펙테이터』,p.206)

카이유와는『돌들의 글쓰기』의 한 부분에서 암석의 무늬를 “특별한 기호들(의 집합)”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그는 글들을 “읽음”으로써 그들이 보이고자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창조물과 사물을 보는 방법을 배운다고 주장한다 (ibid.,pp.214-215)